제가 이전에 70이 넘는 할머니들이 봉정암을 지나 설악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도 저렇게만 살자. 그러다 어느날 비행기 사고로 죽자. 70이 넘어도 설악산을 오를 수 있다면 건강 때문에 자식들이나 주변사람들에게 추한 꼴은 안보일 것 아닌가. 그리고 비행기사고로 죽으면 노환같은 병치레없이 화끈하게 죽으면서 자식들 살림 밑천을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은가.'

한때 이런 생각을 했다가 하나님이 요따우 생각하는 놈은 미워서 치질로 고생하다 경운기에 받혀 죽게 만들 것 같아서 포기를 했었습니다.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비행기에서 잠을 청하고 있을 때 왜 그 생각이 다시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지금의 내 나이가 75세쯤 되고 돌아오는 비행기가 사고가 나서 죽는다면 그때 그 소원이 100% 성취되는 거라는 계산을 했기 때문일 겁니다. 등산을 가고있는 중이였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요즘은 늙었다고 죽으란 법은 절대로 없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게 나이먹어 가고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출발입니다.

저만 그런 줄 알았더니 모두들 약속시간인 9시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하여 면세점등을 둘러보고 있었다더군요. 회장님께서 전송을 나와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해외등정은 희망자를 모집하여 가는 것이긴 하지만 망월산악회의 공식행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재경망월산악회를 대표하는 해외등정대원인 것입니다.

11시 35분 발. 말레이항공 MH065편 탑승. 기내에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잡생각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4,000m가 넘는 산을 간다는 설레임도 한 몫 했을 겁니다. 공항에서 출발기념사진을 찍고 난 후에 하셨던 회장님의 말씀도 생각이 났습니다. 날더러 가장 젊은 동문이니 역할을 많이 해달라는 말씀이였습니다. 순간 뒤통수가 뜨껌했었습니다. 그때까지 만해도 제 스스로가 4,000m를 올라갈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에 다른 사람을 도와가며 뭘 해야겠다는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별도의 역할 분담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하다보면 내가 해야할 일도 있겠지 하고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5시 30분. 현지시간으로는 4시 30분에 코타 키나바루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는 한국인 현지 가이드가 마중을 나와 있습니다. 가이드는 이 사람말고 말레이시아인 가이드가 한 명 더 있습니다. 중국계 여자로 예쁘장하게 생겼습니다. 버스에 올라 인사를 나누는데 일행에 우리말고도 키나바루 산 등정을 제외한 나머지 일정을 함께 하기로 되어있는 관광객 부부 한 쌍이 더 있습니다.

가이드가 일정에 대해 설명합니다. 원래는 키나바루 산에 인접해 있는 Rose Cabin 이라는 곳에서 오늘밤을 묵을 예정이였으나 주말이라 예약이 모두 차버려 방을 구하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Bevery Hotel로 변경했답니다. 오히려 호텔은 더 크고 깨끗하며 시내에 있어 지내기는 더 좋을 것이나 키나바루 산과 멀어서 내일 아침은 예정보다 1시간쯤 일찍 일어나야 할거랍니다.

내일 키나바루 산중에서 묵어야할 산장도 예약이 완료되어 우리 팀은 침상을 배정받지 못한 채 올라가야 한답니다. 이전에는 침상을 배정받지 못하면 입산자체가 불가능했으나 근래 와서 외국인의 경우는 침상이 없어도 식당바닥에서 잘 수 있도록 허용해주고 있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식당바닥에서 자기로 하고 올라간답니다. 근심의 그림자가 얼핏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대원들은 우리나라 산에서도 대피소 복도에서 자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 문제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안내된 Bevery Hotel은 중간급 호텔이긴 하나 아담하고 괜찮아 보입니다. 짐은 산에 가져가야 할 것과 호텔에 두고 갈 것으로 나누어서 꾸리랍니다. 등정에 불필요한 짐은 호텔에 두고 갈 거랍니다. 저는 동행한 전문가이드인 임 사장님과 한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분과 한방을 쓰면서 해외산행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오히려 잘 된 것 같습니다. 우선 가이드가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전문 가이드인 임사장에, 한국인 현지 가이드, 거기다 말레이시아인 가이드까지...

임 사장님의 설명입니다. 먼저, 한국인 현지가이드는 실질적으로 현지에서의 모든 일정을 챙겨야 하니까 없으면 안되는 사람이고, 말레이시아인 가이드는 법으로 자국민 가이드를 동행시키도록 되어있어 어쩔 수 없으며 감시원이나 마찬가지랍니다. 이건 우리나라도 그렇고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게 하고 있답니다. 제일 심각한 것이 우리나라에 오는 일본인 관광객으로 한국인 가이드를 붙이지 않으면 역사나 문화를 왜곡된 관점에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답니다. 마지막으로, 임 사장 자신은 자신도 경비를 부담하면서 왔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가이드가 아니랍니다. 단체해외여행은 15명이 되어야 무료가이드 1명이 동행할 수 있답니다. 이번의 우리 일행은 자기를 포함하더라도 12명이여서 무료 동행이 불가능한 경우랍니다. 그러나 해외산행을 처음 간다는 재곤 선배의 부탁 때문에 할 수없이 자신이 경비를 부담하면서 동행했다는 겁니다. 할말이 없더군요. 어떤 형태로든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이분은 여기 키나바루 산은 몇 번을 올랐는지 셀 수도 없고, 킬리만자로도 4번 올랐으며, 네팔도 여러 번 갔었답니다. 캐나다로 기억합니다마는 외국의 암벽등반 자격도 받았다고 했습니다. 에베레스트, 매킨리 등 최고봉 등정을 제외하고 일반인이 오를 수 있는 한계라는 5,000m대까지의 등반은 국내에서는 자신이 가장 많이 올랐을 거랍니다. 갑자기 존경스러워 졌습니다. 제가 다른 때라면 몰라도 4,000m대 산을 오르겠다고 나선 지금은 이분 앞에서 완전히 '깨갱'(강아지 울음소리)입니다.

식사집합을 위해 로비로 내려갔습니다. 최 고문님이 먼저 내려와 말레이시아인 가이드와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이 아가씨는 우리 일행 중에 최 고문님과 가장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물론 최 고문님의 유창한 영어실력이 있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오랜 해외근무 경력 때문인지 최 고문님은 영어에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녁식사를 위해 한국인이 경영하는 중국식당으로 갔습니다. 식당이름은 아와시(AVASI)입니다. 여기서 먹은 메뉴인 스팀벗은 샤브샤브처럼 해물이랑 야채등을 끓는 육수에 데쳐먹는 건데 우리 입맛에 아주 잘 맞습니다. 이 식당의 사장은 재곤 선배랑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확인 못했습니다만 재곤 선배님 아들 친구라고 들은 것 같습니다. 해외산행을 처음 간다는 사람이 첫 행선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다니 세상이 그리 넓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이 넓고도 좁다는 사실은 같은 자리에서 또 한번 확인됐습니다. 등반만 제외하고 우리와 같은 일정으로 나선 관광객 부부(김영규)가 있다고 했었죠? 이분이 식사 중에 자기도 잘 아는 동래고 동문이 한 명 있는데, 지금은 LA에 살고있으며 부인끼리 친구인 관계로 알게되어 매우 친하게 지낸다 했습니다. 이름은 김영기라 했습니다. 32-3회 선배님이랑 연배가 비슷할 것 같아서 박영진 선배님이랑 최 고문님께 이런 분 아느냐고 여쭤봤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너무나 절친한 사이랍니다. 지금도 서로가 한국과 미국을 오갈 때면 꼭 만난답니다. 어찌 세상이 좁다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내일 산행 때문에 술은 곤란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몰라 시버스 리걸 1병을 가지고 갔댔습니다. 박영진 선배님이 등정 끝나고 저녁때 필요할 거라며 인천공항에서 2병 사다 제게 맡긴 것을 포함해서 제게만 양주가 3병이 있었습니다. 딱 한잔 만 하기로 하고 무사 등정을 기원하며 입술만 적셨습니다. 사실은 한 병 다 비웠습니다. 이번 등정대원의 가장 확실한 공통점하나는 술을 거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선지 시버스 리걸 한 병이 2잔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재곤 선배는 4명이나 참가하여 다수당이 된 44회 선배들이 걱정이 되는지 오늘은 술을 그만 마셔야할 거라는 당부를 잊지 않습니다.

호텔에서 44회 선배님들의 호출이 왔습니다. 가보니 잭다니엘 한 병이 뚜껑이 열려 있더군요. 이분들, 혼자가 돼있는 막내가 안쓰러워 자기들 자리로 부른 것 같습니다. 그런 고마운 마음을 거절할 수 있을 만큼 제가 인간성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오가는 이야기들이 제게는 놓치고 싶지 않은 것들 이였습니다. 산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많았던 건 당연합니다.

두 번째 날입니다.

짐 정리에 아침식사까지 끝내고 8시 30분까지 로비에 집합해야 합니다. 44회 선배님들은 늦게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집합시간에는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모였습니다. 버스로 키나바루 산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에는 산을 올라가지 않을 김영규 사장님 부부도 동승했습니다. 키나바루 공원 입구에서만 구경하고 돌아올 거랍니다.

모자라는 잠을 채워볼 심산으로 자세를 잡았지만 쿠션도 좋지않은 버스가 3분정도 간격으로 한번씩 튀는 바람에 영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혹시나 튀는 게 끝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로 자세를 풀지 않고 버티기를 한 시간쯤 했을 겁니다. 키나바루 산이 보인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멀리 잔잔한 산줄기 가운데 희한하게 생긴 산 하나가 툭 튀어나와 있는 게 보입니다. 처음엔 그리 크게 보이지 않던 산이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커지고 웅장해집니다. 산의 모양이 우리나라에서 보아왔던 산이나 알프스, 안데스에서 보았던 산과는 매우 달라 보입니다. 우선 색깔이 검습니다. 왼쪽은 낮고 오른쪽이 주봉인 듯 높고 날카로운 봉우리 군을 이루고 있어 사자가 왕관을 쓰고 엎드려 있는 그림자 같습니다.

가이드가 이곳에서 나는 과일을 시식해보자며 길옆 과일가게가 모여 있는 곳에 버스를 세웁니다. 파인애플과 꼬마 바나나, 역시 나무에서 제대로 익은 놈이라 맛이 좋습니다. 산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싶어 산이 잘 보이는 길가에 서서 카메라를 정조준하고 기다렸습니다마는 버스에서는 잘 보이던 전경이 여기서는 구름에 휘감겨 좀처럼 제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버스가 산을 뒤로하고 얼마를 달리니 산이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한참 뒤에 다시 나타난 산은 아까 봤던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주봉이 있는 오른쪽으로 돌아선 모양입니다. 길고 가늘게 떨어지고 있는 폭포도 보입니다. 산 높이가 4,000m를 넘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폭포의 길이가 수백 미터는 족히 될 것으로 보입니다.

공원 입구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가 않습니다. 관리사무소에서 가이드가 입산허가를 받아오는 동안 기념품 가게나 주차장 등을 서성이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가게에는 달러가 통용되지도 않고 신용카드도 사용이 되지 않습니다. 말레이시아 화폐는 링깃인데 우리나라 은행에서는 취급하지 않아 공항에서는 달러화로 바꾸었다가 말레이시아에 가서 다시 링깃화로 바꾸어야 합니다.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후 링깃화로 환전할 시간이 없어 음료수 한병도 사먹기 어렵습니다.

사무소 앞에 서성이던 말레이시아 젊은이 하나가 내게로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우며 "Korea sports team very good"이라고 말하더라구요. 월드컵의 한국팀 게임을 많이 봤으며 그때부터 한국축구팀을 매우 좋아하게 됐답니다. 월드컵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입산 수속이 끝나고 목줄이 달린 ID카드를 나누어줍니다. 전면에는 키나바루산 사진이 인쇄되어 있고 그 위에 '사진말고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발자국말고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말라'는 경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멋있는 문장입니다. 뒷면에는 각자의 이름과 입산 날짜랑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럴듯한 격식은 모두 갖춘 셈입니다. 세르파는 입산객 7명당 1명으로 우리 팀에는 2명이 배정되었습니다. 이 친구들이 하나는 맨 선두에 서고 하나는 맨 후미에 서서 우리를 안내할 거랍니다. 등반로가 하나 뿐이어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으므로 이 친구들의 주요 임무는 안내라기보다 정산 등정여부를 확인해 주는 거라는 게 전문가이드의 설명입니다. 이 친구들이 확인해 줘야 정상 등정 확인서를 발급해 준답니다. 둘 중 Joan이라는 친구가 앳돼 보여 나이를 물었더니 옆에 있던 친구들은 18 또는 19살이라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자기가 20살이라고 우깁니다.

버스를 타고 출발점으로 10분 가량 산 속으로 더 들어갔습니다. 지붕 가운데가 위로 뾰쪽하게 치켜올린 출입문이 보입니다. 여기가 출발점인 팀포흔 게이트(Timpohon Gate, 해발1,866m)입니다. 게이트 앞 안내판에는 이 등정로를 산악마라톤으로 주파한 사람들의 기록을 남녀 3위까지 크게 적어 놓았습니다. 최고기록은 2시간 42분 35초로 멕시코인 Ricardo Mesia가 세웠다고 적혀있습니다. 이런 기록을 이렇게 크게 적어 두는 것이 당사자들에게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 되겠지만 이 사람들이 뛰어갔다 오는 데 3시간도 안 걸린 길을 1박 2일로 등정을 해야하는 일반인들에게는 맥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11 : 00. 드디어 키나바루 등정의 시작입니다. 시간은 1분이 모자라는 11시입니다. 어제 잠이 모자랐던 44회 선배님들의 표정에 근심이 스치는 듯했습니다. 특히 배낭이 가장 무거운 문성 선배의 표정이 가장 어두워 보였습니다. 길은 잘 다듬어져 있어 걷기에 어려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라반라타 산장까지는 이렇게 길이 잘 나있답니다. 경사가 크지 않은 길을 200m쯤 가니 조그마한 폭포가 나옵니다. Carson Fall입니다. 나무의자를 만들어놓아 쉬어갈 수 있게 해놓았습니다. 그냥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11 : 25. 첫 번째 쉼터인 Kandis Shelter입니다. 이 산의 등반로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정자와 물을 받을 수 있도록 물 탱크를 준비해놓은 Shelter라는 쉼터와, 비상시에 사람이 묵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Hut라는 대피소가 각각 6개씩 있습니다. 쉼터는 모두 오늘의 목적지인 라반라타 산장 아래에 비슷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대피소는 라반라타 산장을 전후로 비교적 밀집되어 있습니다. 쉼터에 설치되어 있는 탱크의 물은 고여있는 물이 아니라 위쪽에서부터 연결된 파이프로 계속적으로 흐르며 공급되고 있답니다. 탱크에는 처리되지 않은 물(Untreated Water)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최 고문님은 정수처리가 안된 물이라고 해석하고 마시기를 꺼려했으나 저는 여기에 물이 있다는 것을 믿고 수통을 채우지 않고 온 터라 이것을 생수라고 해석하고 그냥 마시기로 했습니다. 사실 생수라면 영어로 Spring Water또는 Mineral Water라고 썼어야 맞습니다. 물맛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였습니다. 잠시 쉬면서 물 한모금 마시고 수통은 반만 채웠습니다.

조금을 더 올라가니 1km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여기를 지나고 부터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계속됩니다. 연락병처럼 앞뒤를 오가는 원호 선배의 말로는 문성 선배가 무거운 배낭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 덕영, 순형 선배가 함께 후미로 오고있다는 거였습니다. 경사가 급해지면서 피치가 큰 나무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한 차례 숨가쁨은 지나갔으나 땀이 비 오듯 합니다. 등산로 양옆으로 열대우림의 거대한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나무의 표면은 거의 이끼로 덮여 있습니다. 그 이끼 위에 각양각색의 난초가 엄청나게 자라고 있습니다. 개체수도 많지만 종류도 매우 다양해서 난초박물관에 온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11 : 42. 두 번째 쉼터 Ubah Shelter. 우리가 점심을 먹기로 되어있는 라양라양 대피소까지는 고소증이 올 염려가 없으므로 거기까지는 속력을 좀 내야 그 다음부터는 고소적응을 위해 천천히 올라갈 수 있을 거라는 게 전문가이드의 이야기였습니다. 잠시 쉬고 있는 동안 32, 33회 선배님들이 도착했습니다. 말은 힘들어 죽겠다고 하면서도 끄떡없이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 곧이어 44회 선배님들도 모두 도착했습니다. 너무 오래 쉬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다는 가이드의 독촉에 다시 출발했습니다. 쉬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다리에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12 : 15. 세 번째 쉼터 Lowii Shelter. 잠깐 서서 뒤를 돌아보고는 그냥 통과했습니다. 자주 쉬면서 왔기 때문에 별도로 쉬어야 할 필요도 없었지만 앞뒤로 우리 대원이 한 명도 안보였기 때문에 부지런히 가야했습니다.

혼자 되어 오르는 도중 서말레이시아에서 왔다는 차도르를 쓴 회교복장의 여자와 보조를 맞추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실례를 무릎쓰고 나이를 물어보니 몇 살로 보이냐고 되물어보더군요. 스물 둘이나 셋 정도로 보인다니까 매우 기분 좋아하며 스물 여섯이랍니다. 이쪽 사람들 겉모습으로는 도대체 나이 짐작이 어려워 물어 본 거였습니다. 직업은 교사인데 주말을 이용해서 등산을 왔다 했으며 월요일 출근을 위해 내일 비행기로 쿠알라룸푸르로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등산을 매우 좋아하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거기다 비행기타고 혼자 등산다닐 정도면 경제적으로도 어렵지 않은 처지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신고있는 신발이 우리나라여학생들이 좋아하는 패션 운동화 같은 것을 신고 있었습니다. 자존심 상할까봐 그것까지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차도르까지 쓴 회교복장에 신발까지 그런 걸 신고 이런 산을 오르고 있다는 게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월드컵을 화제로 올리니, 이 아가씨 축구는 완전깡통인 것 같았습니다. 월드컵이 있었던 것은 아는데 어디서 했으며 한국이 어쨌다는 것 등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조금은 실망스러웠습니다.

13 : 30. 점심을 하기로 한 라양라양 대피소(Layang Layang Hut, 해발 1,702m)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도착한 대원들(일부러 확인을 하지 않아 자신은 없지만 가이드와 최 고문님, 원호 선배, 재곤 형수 등 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빠지신 분 연락주시면 고치겠습니다)은 많이 떨어진 기온 때문에 긴팔옷이나 윈드자켓을 꺼내 입고 쉬고 있었습니다. 반바지로 올라왔던 저도 여기서 긴바지와 자켓을 모두 꺼내서 껴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곳의 높이가 백두산의 높이와 거의 같고 출발했던 팀포흔 게이트의 높이가 1,866m였으니 대청봉 높이에서 출발하여 백두산 높이까지 온 셈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놓고 보니 감흥이 새롭습니다. 이제부터 올라가는 높이는 한반도 땅에는 없는 높이라는 얘깁니다.

현지 가이드가 준비해서 직접 매고 온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원래는 팀포흔 게이트에서 각자의 도시락을 나누어서 배낭에 넣고 왔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가이드가 우리 팀이 연령이 높은 점을 감안해서인지 자기가 도시락을 박스채로 매고 올라가겠다고 했습니다. 만만찮게 무거울 게 뻔했습니다. 막상 올라와 보니 몇몇 분은 자기 도시락을 자기배낭에 넣고 왔습니다. 제일 젊다는 제가 제 도시락도 스스로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굴이 화끈해왔었습니다. 염체불구하고 먹었습니다. 한국식으로 준비한 도시락에는 반찬을 조금 조금씩 알미늄 호일이나 작은 비닐 봉지에 싸놓은 게 10가지는 되는 것 같았고 보리차에 과일까지 들어있습니다. 산에서 먹는 도시락으로는 너무 호사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추위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고산증세가 올 수 있으므로 모두들 타이레놀을 먹어두라고 합니다. 모두들 시키는 대로 두 알씩 먹었는데 저는 왠지 내키지 않아 그냥 견뎌보기로 했습니다. 원호 선배는 손끝이 저린다며 이게 고산증세가 아닐까 걱정스럽게 물어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손끝에 피가 안 통하는 것처럼 저려옵니다. 다른 사람은 괜찮다고들 합니다. 고산증세임이 틀림없습니다.

14 : 45. 다시 출발. 가이드가 많이 늦었다며 걱정합니다. 오전 보다 훨씬 숨이 많이 찹니다. 백두산보다 높은 곳을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 실감납니다. 지금까지 보이던 활엽수들이 일시에 사라지고 잎이 침엽수에 가까운 키작은 나무들이 나타납니다. 이제는 나무들의 키가 작아 주변 경치가 보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산 아래는 아래대로 위는 위대로 구름에 가려서 경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두 층의 구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15 : 45. 5km 표시판 통과. 숨은 가쁘나 그리 많이 온 것 같지는 않은 곳에 작은 바위 언덕이 나타났습니다. 구름덩이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아래쪽 조망은 고산지다운 웅장함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누군가 산이 보인다고 소리쳤습니다. 뒤돌아 위를 보니 그동안 구름 속에 가려서 볼 수 없었던 거대한 암봉이 시커멓게 모습을 드러고 있습니다. 그것도 잠깐이었을 뿐입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조금 올라가니 주 등산로 옆으로 샛길이 보였습니다. 재곤 선배랑 같이 가보니 아직 완공이 안된 듯한 헬기장입니다. 그렇다면 여기가 해발 3,052m 지점입니다. 정확히 1시간동안 350m 올라온 것입니다. 목적지인 산장까지는 고도로 221m 남았습니다. 다리에 힘이 많이 빠진데다 갈수록 숨이 가빠져서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 지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1km도 남지 않았다는 희망에 마지막 힘을 다했습니다.

옆에 가는 재곤 선배도 상당히 지친 것 같아 보입니다. 앞뒤로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보이질 않습니다. 조금 전 바위언덕에서는 선두와 후미를 다 만났었는데 벌써 간격이 벌어져 버렸습니다. 지친 몸을 끌고 소걸음처럼 어슬렁어슬렁 걸었습니다. 머릿속에는 얼마나 남았을까하는 생각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습니다. 더 이상 걷는 게 짜증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쯤 이였습니다. 눈앞에 신기루처럼 슬레이트 지붕의 집이 하나 보였습니다. Waras Hut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 온 겁니다. Waras Hut를 오른쪽으로 돌아 조금을 더 올라가니 제법 규모가 큰 이층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라반라타 산장이 틀림없습니다.

16 : 45. 라반라타 산장(Lavan Rata Rest House, 3,273m). 이젠 정말로 다 왔습니다. 오늘의 고행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또다시 정확히 한시간만에 221m를 올라 온 겁니다. 최 고문님과 원호 선배, 재곤 형수님 등이 먼저 도착해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이 4시 25분에 도착했답니다. 원호 선배의 얼굴이 영 밝지가 못합니다. 십중팔구 두통이 오고 있나봅니다. 저도 심하지는 않지만 약한 두통이 뇌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추위를 피해 산장안으로 들어가고 저는 아직 땀이 덜 식어 견딜만하여 후미의 안내를 위해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땀은 금방 식어버리고 무시못할 추위가 느껴집니다. 안개비처럼 흩날리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도착하고 10분쯤 지났을 때 후미가 모두 도착했습니다. 서둘러 산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굵은 빗방울이 세차게 뿌려댑니다. 정말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비 한방울 안 맞고 산장에 도착한 것입니다.

비를 피해 몰려온 등산객으로 식당 안은 무척 혼잡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먼저 온 대원이 자리를 확보해 놓고 있어서 한자리에 둘러앉을 수 있었습니다. 서울서부터 가져온 족발이 나왔습니다. 술을 마시느냐 여부를 놓고 잠깐 토론을 벌이다 참이슬로 그야말로 입술만 축였습니다. 꿀맛처럼 혀에 감기지만 내일 정상등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박영진 선배님은 이슬람 국가에서 족발을 꺼내놓고 먹는다는 게 신경이 많이 쓰였던 모양입니다.

산장에 방이 없어 식당이 끝나고 난 후 식당바닥에서 자야 한다는 걸 알고 왔지만 들락거리는 등산객이 떨어트린 빗물에 젖어있는 바닥을 보니 마음이 심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무로 되어있으니 닦아낸다고 쉽게 마르지도 않을 것 같았습니다.

식사 중 현지 가이드가 침상 7개를 확보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확보된 잠자리는 라반라타 산장보다 조금 위에 위치한 Burlington Hut 이긴 하지만 자는 데 불편함은 전혀 없는 곳이랍니다. 반가운 소식이기는 한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대원 10명(전문가이드포함) 중 누가 식당바닥에서 자야하느냐는 문젭니다. 저는 막내인 내가 식당바닥에 자야하는 3명중에 당연히 포함되어야한다고 말했지만 재곤 선배의 논리는 비박에 이력이 붙은 임 사장과 자기 내외가 식당바닥에 자는 게 옳다는 것 이였습니다. 토론 결과 재곤 선배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으나 제 입장에서는 마음에 밟힐 수밖에 없는 일 이였습니다. 젊다는 제가 다른 대원들에게 도움을 주지도 못하고 천덕꾸러기노릇만 계속하고 있는 꼴입니다.

잠자리가 확보된 7명은 Burlington Hut으로 이동했습니다. 방 하나 당 이층침대가 둘씩 있어 방 한 개는 우리 대원이 모두 쓸 수 있으나 나머지 한방에는 영국에서 온 등산객 한 명과 같이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샤워를 할 수 있을까하여 알아봤으나 더운물이 나오지 않는답니다. 아래의 라반라타 산장은 더운물을 쓸 수 있답니다. 할 수없이 세수와 손발만 닦은 채 잠을 청했으나 잠을 이루는 것 또한 쉽지가 않았습니다. 옆방에서 먼저 잠든 XX선배의 코고는 소리가 얇은 벽 따위는 아예 무시하며 쳐들어오고 있다는 것도 문제지만 밤늦게까지 복도와 방을 들락거리는 다른 등산객들의 불면증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제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약하게나마 코고는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제처럼 잠을 설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이렇게 산중의 밤은 사그라지며 내일을 끌고 옵니다.

세 번째 날입니다.

몽롱한 상태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깐씩 잠이 들기도 했나봅니다. 아래침상에 자는 영국인의 부스럭거림에 잠을 깨어 시계를 보니 2시. 일어나야 할 시간인데 아무도 일어나는 낌새가 없습니다. 한참동안 말똥말똥한 눈을 어둠 속에 두리번거리며 누워 있다보니 주변이 어수선해집니다. 일어나 간단히 세수하고 배낭을 챙겼습니다. 다들 잠을 설쳤다고 한마디씩 합니다. 불필요한 것은 방에 두고 가도 된다고 했으나 별로 빼놓을 것도 없습니다. 아래의 라반라타 산장 식당 바닥에서 잤던 대원들이 올라와 준비 상황을 묻습니다.

재곤 형수님이 어제 밤부터 두통이 심하다며 찡그린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고소증세입니다. 갈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으나 본인의 강력한 의지표명 때문인지 전문가이드도 갈 것을 허용했습니다. 더 심해지지만 않으면 갔다올 수는 있을 거랍니다. 말린다고 안 갈 사람도 아닐 것 같습니다.

02 : 30. 정상을 향해 출발입니다. 대피소 밖을 나서니 부스스 안개비가 흩날리는 게 날씨가 썩 좋지를 못합니다. 가이드의 말로는 정상에 도착하면 좋아질 거니까 걱정하지 말랍니다. 산장에 머물렀던 등산객이 일시에 나선 바람에 오르막 길이 심하게 정체됩니다. 설악산 무박산행에서 보았던 것처럼 머리에 밝힌 라이트 불빛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출발 전에 박영진 선배님과 최 고문님이 기념사진이라도 함께 찍으려면 같이 도착해야 하므로 걸음이 느린 사람이 앞서 나가고 다른 대원은 그 속도에 맞추어 나가도록 하자고 제안했었습니다. 때문에 어둠 속에 '망월'을 외치며 대형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다른 그룹과 섞이는 바람에 선두와 후미의 간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걱정했던 것보다 숨이 덜 찹니다. 정체가 되어 속도를 낼 수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땀도 거의 나지 않습니다. 조금씩 정체가 풀려가며 속도가 나자 금방 숨이 차 오르고 땀이 송글송글 솟기 시작합니다.

03 : 38. 마지막 대피소인 사야사야 대피소(Sayat-Sayat Hut, 3,668m)에 도착하니 세르파가 그새 우리 구호를 익혀서 어둠 속에 '망월'을 외치며 우리 대원을 부르고 있습니다. 대피소 안을 들어가니 먼저 도착한 대원들이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있습니다. 이곳 대피소 관리인에게 ID카드를 보여주고 정상등정에 들어갔음을 확인을 해야한답니다.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등정확인서를 발급해주지는 않습니다. 내려올 때 세르파가 정상까지 갔음을 확인해줘야만 발급해준답니다. 정상까지 못 갔어도 증명서를 주기는 하는데 흑백으로 된 것을 준답니다.

간식을 먹는 등 제법 긴 휴식을 취하는 동안 후미까지 모두 도착했습니다. 간식을 꺼내먹느라 풀어헤쳤던 배낭을 정리하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정상 공격입니다. 안개비는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안개비라고는 하나 보슬비보다 방울이 굵은 것 같습니다. 때문에 수첩을 꺼내 시간을 기록하기도 어렵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계속 밧줄이 쳐져있습니다. 이 밧줄은 가파른 암릉에서는 당겨가며 타고 오르는 데 쓰이고, 평평한 바윗길에서는 길을 알려주는 가이드 역할을 합니다. 끝도 없을 것 같은 바윗길을 밧줄을 따라 오르고 또 오릅니다. 가파른 경사가 많은 지역을 지나니 20도 정도 경사의 암벽 들판이 나타납니다. 여명이 밝아와 헤드라이트 없이도 걸을 수 있을 만큼 되자 주변형세가 조금씩 눈에 들어옵니다. 완만한 경사의 검은 들판을 느린 걸음으로 걸어 올라가고 있는 대원들의 모습은 고행의 길을 떠나 사막을 걷고있는 순례자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암벽들판의 크기가 엄청나 보입니다. 정상이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정상을 오르기 직전 바윗길 능선의 저쪽에 햇살이 비칩니다. 오늘 등정 후 처음 보는 햇살입니다. 능선위로 올라섰습니다. 구름 틈새가 지나가며 정상에서 흘러내리는 암산의 자태를 잠깐, 아주 잠깐 보여줍니다. 한 30초 정도 였을까요. 그 짧은 시간에 펼쳐진 암산의 장관은 눈 덮힌 알프스의 산과 모양이 다를 바 없었습니다. 알프스의 그것과 분명히 다른 한가지는 색깔이 검다는 것 뿐 이였습니다. 그 구름 틈새가 지나가며 주위의 다른 봉우리도 슬쩍슬쩍 보여줬습니다. 그림자처럼 보여주고 사라진 그 봉우리들은 엄청나게 큰 촛대바위처럼 보였습니다.

정상의 마지막 경사 직전에 8.5km라고 쓴 표지판이 있습니다. 공원 관리사무소에서 나누어준 안내그림에는 8km로 표시되어 실제와 다릅니다. 이제 정말 정상이 보입니다. 원호 선배가 마지막 경사를 오르고있습니다. 정상부분은 큼직한 바위로 거대한 무덤을 쌓아 놓은 듯 대청봉과 흡사합니다. 마지막 피치를 올리며 정상팻말이 보이는 곳까지 오니 먼저 왔던 재곤 형수님이 추위에 견딜 수 없다며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재곤 선배는 촬영을 위해 하산하지 못하고 추위를 계속 견디고 있었고요.

05 : 05. 드디어 정상입니다. 더 오를 곳이 없습니다. 4,095.2m를 오른 것입니다.

좁은 정상에서 "Low`s Peak. 4,095.2m"라고 쓴 정상표시 팻말을 안고 기념촬영 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5분쯤 뒤 나머지 대원들도 모두 도착했습니다. 안개비와 추위 때문에 서둘러 촬영을 끝내고 8.5km 표지판이 있는 능선으로 내려왔습니다. 정상주로 양주 한잔씩을 급히 돌렸습니다. 원호 선배가 정상주로 쓸려고 아껴둔 발렌타인 17년생 이였습니다. 안주삼아 육포 한 조각씩 씹으며 하산을 서둘렀습니다. 추위 때문입니다.

올라올 때는 어두워서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등반로가 제대로 보입니다. 구름에 가려 시야가 넓지는 않지만 하나로 된 듯한 평탄한 바위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펼쳐져 있습니다. 등반로 표시를 위해 걸쳐놓은 밧줄이 없다면 길을 잃기가 십상이겠습니다. 어떤 곳은 이런 곳을 어떻게 올라 왔을까 싶을 정도로 가파른 곳도 있고 한쪽이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인 곳도 있습니다. 사야사야 대피소에서 하산 확인을 하고 잠깐의 휴식 후 바로 산장을 향했습니다.

07 : 10. 숙소인 Burlington Hut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정상까지 오르는데 2시간 35분 걸렸고 정상에서 보낸 시간을 감안하면 하산에 1시간 40분쯤(정상에서 25분 머물렀다고 가정) 걸린 셈입니다.

식당이 있는 라반라타 산장으로 다시 내려와 식사를 위해 둘러앉았습니다. 아메리칸 스타일의 아침식사도 있으나 국물이 있는 국수로 하기로 했습니다. 모두들 몸은 피로에 젖어있어도 해냈다는 안도감에 표정은 밝습니다. 구름 때문에 경치를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임 사장님도 지금까지 숱하게 올라갔어도 구름 때문에 경치를 볼 수 없었던 경우는 두 번 밖에 없었답니다. 낮이나 밤에는 대부분 구름에 갇혀있지만 해뜨는 시간에는 거의 구름이 없었답니다.
박영진 선배님이 또다시 문성 선배에게 농을 겁니다.
"문성씨하고 내하고 성공했으니까 전체가 다 성공한거야"

식사를 끝내고 출발준비를 했습니다. 배낭이 너무 무거운 사람들은 다른 대원들과 조금씩 나누며 무게조절도하고 화장실 볼일도 보느라 시간이 꽤 지체됩니다.

08 : 30. 하산 출발. 계단이 많아 신경이 쓰이지만 그래도 오를 때보다는 한결 수월한 느낌입니다. 이전에 장거리 하산길이면 의례 무릎에 부담을 느끼곤 했었는데 무릎보호대를 양다리에 착용했더니 부담이라곤 거의 느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고소에서 가볍게 느껴지던 두통이 없어지니 주변이 맑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고산증세로 두통이 심했던 재곤 형수님도 2,000m 대로 내려와서는 두통이 없어졌답니다.

부산에서 와서 우리보다 하루 늦게 등정을 시작해서 지금 올라가는 중이라는 한국인 팀을 만났습니다. 산장에 숙소예약이 안되어 하루를 미룬 거랍니다. 대구 경북고 동문으로 재부동문회에서 왔댔습니다. 부산 출신으로 재경동문회에서 온 우리나 꼭 같습니다. 옷차림새나 배낭이 산엘 그리 많이 다녀보지 않은 사람들 같아서 은근히 걱정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날씨가 안 좋아 경치 구경을 못했지만 내일은 날씨가 좋아져서 좋은 구경하기 바란다고 인사를 나누고 왔습니다.

※ 이분들을 귀국하는 날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 날 라반라타 산장에서 자고 다음날 새벽에 정상을 올라갈려니 날씨가 너무 나빠 입산이 금지되었답니다. 그래도 그냥 갈 수는 없다 싶어서 산장에서 하루를 더 잤으나 그 다음날도 역시 입산금지되어 정상등정을 포기하고 내려왔답니다.

13 : 52. 팀포흔 게이트 도착. 후미가 꽤 늦을 것으로 생각되어 재곤 선배가 어디 눈 좀 붙일 곳이 없나며 두리번거리고 있는 동안 후미까지 모두 도착해버렸습니다. 이때가 2시 02분쯤 이였을 겁니다. 산장에서부터 하산에 5시간 반 소요됐습니다. 훌륭한 성적인 것 같습니다.

공원 관리사무소에서 발급된 등정확인서를 받아들고는 모두들 감개무량해했습니다. 이거 없다고 우리가 올라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백 마디 말이 필요 없이 종이 한장으로 우리의 등정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도구입니다. 자기 것을 살펴보고 난 뒤 구겨질세라 한데 모아 잘 보관했다 인천공항에서 돌려 받기로 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우리가 하루를 묵었을 Rose Cabin에서 점심을 했습니다. 길가 낮은 언덕에 큼지막한 식당과 방갈로 같은 이층건물 몇 동이 연이어 있는 식당 겸 호텔입니다. 식당 창가에 앉으니 키나바루 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방갈로도 키나바루 산이 잘 보이도록 배치되어있습니다. 식사에 앞서 맥주를 몇병 주문했습니다. 성공적인 등정을 자축하기 위해서죠. 한 명의 낙오없이, 그리고 작은 사고 하나없이 이렇게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게 그리 쉽지는 않다는 게 전문가이드의 말입니다.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축하합니다"를 외치며 건배했습니다. 이보다 유쾌하고 즐거운 건배가 이전에 있었나 싶습니다. 또 박영진 선배님의 농담입니다. 목에 걸린 등반허가 ID카드를 들어 올리면서 문성 선배에게 제안합니다.
"문성씨, 우리한테는 이게 남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니까. 말레이시아를 떠날 때까지 매일 목에 걸고 다니자"

저녁을 위해 첫날 갔던 식당 아와시의 원형테이블에 둘러 앉았습니다. 이제는 술을 부담스러워할 필요가 없다며 순배가 잘 돌아갑니다. 양주 두 병을 다 비웠고 가져간 소주도 모자라 식당에서 소주를 또 주문해야 했습니다. 이번 등정대원들이 가방에 넣어온 술은 제가 확인 한 것만도 양주 4병, 안동소주 2병, 음양곽주 큰 패트병 1병, 참이슬 최소 20병 이였습니다. 이걸 모두 마셔 없앴습니다. 물론 식당이나 호프집에서 주문해서 마신 소주나 맥주의 양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 날은 마음들이 가벼워선지 시내 술집을 순례하거나 호텔 바에서 늦게까지 기분을 내는 등, 그냥 잠자리에 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네 번째 날입니다.

오늘은 사피섬으로 가서 해수욕을 즐기기로 되어있는데 아침부터 비가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출발을 위해 모두들 로비로 모였는데도 비 때문에 출발을 못하고 한시간 가량을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비가 그쳤습니다. 출발입니다. 사피섬을 가면 배위에서 바닷물 속에 고기들이 노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물이 맑다고 합니다.

사피섬행 보트를 탔습니다. 열 대여섯명 탈 수 있는 크기의 모터보트입니다. 가이드가 큰 비닐봉지를 들고 물에 젖으면 안되는 것들을 넣으랍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했더니 출발하자마자 보트가 파도 위를 날듯이 빠르게 달려가면서 허공에 솟았다 떨어졌다를 반복합니다. 큰 파도에 날려 솟구쳤다 떨어질 때마다 비명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옵니다. 스릴 만점 이였습니다. 속도감도 대단했고요. 얼마나 빨리 달렸으면 보통 30분 걸린다는 거리를 15분만에 도착했을 정돕니다.

물이 맑아 고기가 유영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으나 그건 아닙니다. 비 온 뒤라서 그런지도 몰라도 물이 많이 탁합니다. 모래사장은 아담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작았습니다. 물 속에는 비닐봉지도 심심찮게 떠다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지 않으니 호젓하게 해수욕을 즐기기에는 안성마춤입니다.

모두들 부산출신 이어서인지 해수욕에는 자신있는 듯 일부러 파도가 센 곳으로 가서 파도를 즐깁니다. 그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많은 32회, 33회 선배님들이 가장 적극적입니다. 등산을 가지 않은 일행인 박사장님 부부가 해수욕을 하지 않고 모래사장을 서성이고 있는 것을 보고는 32회 박영진 선배님이 구명자켓만 입으면 안전하고 재미있다며 해수욕을 해볼 것을 집요하게 권합니다. 수영복을 가져오지 않아서 할 수는 없었지만 이분들도 해수욕을 하고싶은 눈치가 역력했습니다.

해물 바베큐로 준비된 식사시간입니다. 대단히 고급 해물은 아니지만 다들 맛있게 먹었으며, 44회 덕영 선배가 가지고 온 음양곽주가 단연 인기였습니다. 한적한 해변가에 맛있는 안주를 놓고, 좋은 술 마시며, 재미있는 이야기 나눌 수 있으니 이 어찌 천국이 아닐소냐. 진정한 분위기는 자연이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겁니다. 정말 분위기 한번 짱 이였습니다.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6시 쿠알라룸푸르행 비행기를 타야합니다. 이 나라에서는 국내선인데도 출국심사를 합니다. 같은 나라인데도 주를 옮겨 갈 때는 신고를 해야 하는 게 이 나라 법이랍니다.

2시간 반을 날아서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이 엄청나게 큽니다. 현지 가이드가 늦게 나와 잠시 공항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버스로 1시간쯤 걸려서 도착한 호텔(Grand Seasons Hotel)은 특급 수준은 돼 보이는 꽤 큰 호텔입니다. 같은 층에 방을 나란히 배정해줘서 우리 방과 옆의 44회 선배님들 방을 터놓고 이번 일정의 마지막 밤의 행사를 개최키로 하였습니다. 몇 분이 가이드와 함께 술을 사러 나갔으나 술 파는 가게를 찾기 어려워 식당에 들러서 사왔답니다. 회교 국가이어서 술값도 비쌀 뿐아니라 구하기도 어렵답니다.

식사 때마다, 밤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었어도 아직도 할 이야기들이 많은가 봅니다. 호텔방이라 안주가 시원찮아 컵라면으로 국물있는 안주를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술이 바닥났는데도 이야기가 계속되자 신기하게도 술이 또 나옵니다. 그렇게들 마지막 밤을 아끼고 또 아낍니다.

다섯 번째 날입니다.

쿠알라룸푸르의 시내관광이 주요 일정입니다. 그동안 너무 재미있어서 일까 이날은 정말 맥빠지는 날 이였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호기심으로 두리번거렸을 법한 바투동굴, 전적기념비, 회교사원 등도 그리 대단한 구경거리로 여기지 않는 듯 싶습니다. 단체관광이 으레 그렇듯이 중간중간 관광객에게 입맛이 당길 만한 쇼핑코스 순례로 빈 시간을 메꾸고 있습니다. 회교복장을 한 41살의 처녀 말레이시아인 가이드가 우리가요 '만남'을 불러냈을 때는 환호의 박수가 터졌댔습니다.

점심때는 44회 덕영 선배가 잘 아는 현지의 한국인 목사님이 식당까지 찾아와서 자기랑 같이 식사를 해야한다며 모셔갔습니다. 덕영 선배는 마지막까지 아껴두었던 안동소주를 점심때 먹으려고 챙겨갔는데 자기는 못 먹고 남만 좋은 일 시켜준 셈이 됐습니다.

저녁식사까지 하루의 일정을 끝내고 귀국을 위해 쿠알라룸푸르 공항으로 갔습니다. 9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새벽 1시 10분 비행기라 시간여유는 있습니다. 탑승게이트 앞에서 우리보다 하루 늦게 키나바루산을 올랐던 한국사람 일행을 만났습니다. 아까 미리 이야기를 했던 바와 같이 이분들은 정상을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쓰릴까 말을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헤어지는 날입니다.

우리시간으로 아침 8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구겨지지 않도록 한 곳에 모아 두었던 등정확인서를 나누어 받으며 다시 한번 감개에 젖었습니다. 조만간 다시 한번 모이자는 약속을 끝으로 재경망월산악회 첫 해외등정 일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저희들의 성공적인 등정은 망월산악회 회원님들의 성원과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 이였습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