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 남북종주 산행기


* 때     :  2002, 6. 6. ~  6. 7
* 코 스 :  마천-문수암-삼정산-벽소령-세석산장-삼신봉-청학동
* 참 가 :  이재곤(41회)과 부인 / 한원호(44회) / 이채근(46회) / 김상현(47회) / 이남수(49회) / 박봉식(50회) / 김진생(54회) / 진진하(46회).      <이상9명>



 선 후배 9명이 지리산 2박 3일 등반했다. 하도 고생하고 또 감동이 새로바서 몇자(약3시간 반 동안)) 썼더니만 이 놈이 그냥 허공으로 사라지네. 참말로 허무하네. 해서 약이 올라 쬐끔씩 연재물로 쓸란다. 동문 여러분 재미없지만 읽어봐 주이소.
다음은 소제목임

1. 반 평 공 간
2. 별 헤는 밤
3. 헬기가 올 까, 안 올까.
4. 동고인, 동고애, 동고야.
5. 600m전
6. 빨간 우체통
7. 질량불변의 법칙
8. 선 후배 없다, 줄서라
9. 산신령님, 망월을 지켜주시옵소서.
10. 아, 남해 낙조




1. 반 평 공간
벽소령 대피소는 금방 어둠에 젖어 들었다. 외등 두어개가 등산객을 맞고, 보낸다. 늦은 저녁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유일한 밝음이요. 멀리서 오는 길손에게는 등대 같으리라.두런두런 이야기 하며 술잔을 돌리는 패들. 랜턴으로 화투장을 밝히며 떠들며 웃는 무리. 마치 시골 장터의 파장  분위기 같은 이 곳 벽소령, 해 질 무렵.
아마 저들은 이곳에 잠자리를 마련한 모양이다. 우린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데... 이밤에, 달도 없는데, 전등 하나로 최소 3.5시간은 행군을 해야 하는데. 여기서 둥지를 튼 저들이 부럽기 그지없다. 지친 이 몸을 뉘일 반평 공간 조차도 이 산상에 없음이 왜 이리 아쉬운가.

벽소령에서 세석까지 6.3km.  정상 산행 시간은 3시간 정도. 일행은 5명. 선발대는(4명) 2시간 전인 7시에 세석 산장에 잠자리 확보를 위해 이미 출발.
재곤형의 목소리가 약간은 비장하다. "다들 준비 됐나? 8시 45분 출발한다. 예상소요시간은 4시간. 도착시각은 1시 예정이다." 간단한 주의 사항과 행동 요령 및 출발 순서, 특히 안전사고를 유념하도록 당부한다.
하늘을 보니 별들만 드문드문 보인다. 달은 보이지 않는다.  음력으로 며칠 이든가? 알리가 있나. 분명 달은 없을것이다. 어젯 밤 남행열차에서도 못 봤으니.  바람 한 줄기에 몸을 추스린다. 역시 산, 지리산은 높구나. 밤 바람이 이리 찬게. 괜히 서글퍼 진다..

부지런히 걸은 덕에 땀도 나고 갈증도 느낀다. 능선의 경사도가 세석까지 이 정도라면 별 무리가 없겠다 싶다.

누군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란다. 그래서 내가 자신있게 ' 서울 할머니와 경상도 할머니 끝말 잇기'를 했더니 아무도 웃지 않는다. 썰렁하다. 지난번에는 배꼽을 잡았는데 이번은 왜 이러지? 내 말을 이해 못하나? 아님 웃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긴장해서 그럴까? 피로가 겹겹이라 청력, 지력이 마비됐나?

긴 침묵이 흐른다. 랜턴을 부러 꺼 본다. 정말 칠흑이다. 이것없이 산행한다면 하고 상상을 해보니 한 발자욱도 나갈 것 같지 않다.
발은 기계처럼 움직이고 머리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가득 찬다.
또 누군가 침묵을 깬다. 빨치산들은 불없이 어떻게 이동 했을까?  그케. 참 신기하다. 그자.  건성으로 대꾸한다.

방향표지판에 이렇게 써있다. -- 세석산장 5.5km. 에고, 반은 온듯 한 기분인데 1km도 못왔다. 겨우 30분 경과. 재곤형이 말한다. 선발대가 걱정하니 이동전화로 소식을 전하란다. 허나 지리산은 이 문명의 이기를 거부한다.

출발, 행군, 휴식. 이런 반복 속에 어느 듯 샘물 있는 곳에 왔다. 여정도 반을 줄였고 계획대로 산행을 한 듯 하다. 물 한모금으로 가슴에 쌓인 불안감을 씻어버리고 피로는 검은 숲속에 던져 버렸다. 또 이런 여유로 물도 보충하고 양치에 세수 까지하는 호사를 누렸다


2. 별 헤는 밤

모두들 하늘을 본다. 아, 별들이 많구나. 참 많구나. 보석같네. 서울에는 없든게 여기는 와 있을꼬? 어, 똥 바가지가 보이네. 그럼 저건 북극성인가 보네.은하수가 비단결이네. 저기 별똥별도 떨어 지고.
다 들 한 마디 씩 한다. 시인이 되었나. 어린애가 되었나. 하기사 어릴 때 나도  저 별 만큼 꿈이 있었지.  그래 남은 산행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꿈을 조각조각 맞추며 가자. 그러면 시간은 훨씬 빨리 지나 가리라.

캄캄한 이 밤에 구천이는 별당아씨를 들쳐 업고  이 산으로 숨어 들었지.그래, 진달래 꽃을 따 , 먹여 주기도 했고 들꽃으로 목걸이도 만들어 걸어 주곤 했다. 아씨를 어느 산기슭에 묻고는 통곡하든 구천이.  지리산에서 별을 헤고 어둠을 보노라니 왜 구천이 생각이 날까?



3. 헬기가 올까, 안 올까?

"어? 불이 안 들어 온다."  가장 크고 밝기가 센 상현의 랜턴에 이상이 생겼다.  때려보고 열어보고 애무하고 달래봐도 영 올 생각을 않는다. 포기를 할 수 밖에.  재곤형이 한 말씀 하신다. 산 장비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라. 가능하면 최신 장비로 바꿔 주기도 하라. 산행 출발 전 장비를 점검해야 한다. 또 배터리등은 항상 여유분을 갖고 다녀야 한다며 여유가 있냐고 묻는다. 다행히 상현과 봉식이 한 벌씩의 여유가 있었다. 가슴이 움찔한다. 랜턴을 준비 못해 재곤형의 여유 랜턴으로 산행하고 있었기 때문에.--유비무환이라, 쯥쯥..

재곤형 뒤로 상현이 따르고 하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속도가 더디다. 불 하나로 2명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땀은 덜 나고 기온은 떨어지고 그래서 몸은 한기를 느끼고. 이런 상태로 예정시각에 도착하기는 무리다. 다시 전화 연락 시도. 하지만 무위.

쉬면서 소주로 체온을 높여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서 비박을 하자. 안된다 장비가 불 충분하다. 너무 힘 들다. 불도 없는데. 여기서 추위에 떨며 있느니 1분에 한 걸음이라도 나가자. 119로 연락 하면 헬기가 뜰까 안 뜰까. 시간은 얼마나 걸리까.핸드폰이 안되는데 119는 연결이 될까? 등  반은 농이요 반은 불안감으로 한 마디 씩 한다.
나도 이자리에 눕고 싶다. 낮에 바위에 부딪힌 무릎이 시큼거린다.
아까 벽소령에서 술을 마시든 패거리들이 또 부러워진다.
아, 세석까지는 고통없이 가야 할 텐데. 그리고 자력으로 청학동, 그리고 애들 앞에 서야 할 텐데. 만약 그렇지 못 하고 누구의 도움으로 하산  한다면 그 자괴감을 어떻게 견디리오. 또 망월은 어떻게 나간다 말인가. 별 생각이 다 든다.

봉식이가 걸어며 뭔가 먹는다. 니 머 묵노? 쫌 주까예? 누룽집니더. 하도 잠이 와가 잠 깰라꼬 십니더. 군대 용어가 생각 난다. "졸면 죽는다."

불행은 연속으로 와야 재미 있는가?  재곤형수의 랜턴도 이상이 생겼다. 이제 재곤형은 앞에 상현, 뒤에 형수를 불 빛 안내하며  더더욱 느린 행군을 하게 된다. 배터리도 교체를 했기에 여유도 없다. 5명이 3개의 랜턴으로 2시간 이상을 가야 한다.

거꾸로 매달려도 시계는 간다고  했나. 어쨌거나 우리의 여정도 모래시계 처럼 조금씩 줄고는 있었다.

산장까지 1.2km 남았고 현재 시각은 1시. 멀리 산장의 불빛이 보인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우리를 격려하는 재곤형. 그러면서 선발대에게 랜턴을 지원 받아야겠다고 전화 접촉 시도.
아, 신호가 간다. " 여보시오, 등산객중에 한원호라고 바꿔 주세요."


4. 동고인, 동고애, 동고야

선발대는 진생이 끓인 찌개로 소주를 마시며 본진을 기다린다. 피곤함이 밀물처럼 밀려 오지만  차마 숙소로 들어 가지 못한다. 두어 순배의 술이 돌고 채근이는 잠시 눈을 붙인다고 들어 가고 원호형, 남수,진생은 별 빛에 둘러 쌓인 촛대봉을 보며 연신 하품을 한다. 기온이 급 강하하고 바람이 일자 추우니 숙소에서 기다리자는 제의에 진생은 뒷 마무리를 하고 들어간다. 시각이 1시경.
숙소 입구의 관리 사무소 직원의 전화 통화 내용이 심상치 않아 진생은 다짜 고짜 잔화기를 빼았는다. "진생인데요. 형님들 어디 있읍니까?" "진생아, 랜턴 2개 가지고 빨리 오너라. 둘이 와야 한다."
진생은 잠시 난감하다. "누구랑 가야지? 모두들 물 먹은 솜인데..
"저기, 혼자 가면 안됩니까?"  "안된다. 꼭 둘 이상이다." 재곤형이 단호하게 말한다. 행여 단독 구조대에 문제가 생기면 진퇴양난이다. 선발대의 형편을 모를리 있겠나 마는 또 누가 그 지긋지긋한 산행을 또 하고 싶어 하겠나 마는 그래도 재곤형은 둘을 요구 한다.

숙소에 와 보니 그 짧은 시간에 둘은 벌써 코를 골며 딴 세상이다. 차마 깨울 용기가 나지 않는다. 옆에 자든 채근이가 마침 뒤척이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아이고 행님 , 빨리 가입시더. 본진들이 랜턴이 업사가 한참 헤매고 있다 하네요. 그래? 니는 빨리 랜턴 챙기라. 근데 내 몸이 와 이래 말이 안 듣노?-- 당연하지 니 나이가 몇 살고?

"마아앙---워을---"  멀리서 동물 울음 소리 같은 울부짖음이 들린다. 모두들  동시에 입을 연다.  이 심산유곡에 시간도 정지 해 버린 그래서 더욱 고즈녁한데, 우리들은 반가움과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뒤엉켜 망월을 토했다. 그리고 지리산에 심었다 우리의 동고야를.

형수의 배낭을 메겠다고 자청한 진생과 이를 사양하는 형수의 다툼이 또 정겨워 우리들은 말리지 않았다. 이것이 동고애라고 하면서.

또 앞 쪽에 실랑이가 인다. 재곤형과 채근이가 서로 배낭을 메겠다고. 하기사 재곤형이 배낭을 넘겨 줄 리 없지. 양반이 화톳불 안 쬐 듯, 소나기 와도 뛰지 않 듯 명색이 산 꾼 인데 어찌 그걸 넘기랴--아! 동고인, 동고인.


5. 600m 전

인간이 극한 상황(?)과  피로가 겹치면 기존의 상식, 가치를 일시 잃어 버리는 것일까? 세석산장 600m 의 표지를 보고 이제는 다 왔다고 그래서 안심이라고 생각 햇다. 한데 600m라는 거리가 이토록 먼가?  택시 기본 거리의 반 밖에 안되고 100m 달리기의 2-3분의 시간의 거리 일진데, 또 도봉, 북한의 600은 한마당 우스개 소리의 거리 이건만 어이하여 지리산의 600은 멀기만 한가. 산장이 뒤로 물러나나. 내 발이 뒷 걸음질 하나. 한  모퉁이 돌면 불 빛이 보여 이제 삶의 무게 보다 더 한 배낭을 벗으리라 했건만 한 고개 지나면 불 빛이 사라진다. 그때마다 오는 어깨의 중압감과 쑤셔오는 무릎의 통증은 도를 더 한다. 600고지도 아니요, 단지 지리산 길 600 이건만 정말로 마지막 600은 길고도 멀었다.  씨팔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확히 01시 40분. 6월 6일 07시 마천을 출발하여 19시간 만에 처음 맛 보는 안도감이다.  담배를 빼 물며 하루를 되 돌아 본다.



6. 빨간 우체통

6월6일 04:30. 남원 도착. 55회 홍영만 후배(원불교 교무로 재직중)가 봉고로 마중을 나왔고 유명하다는 남원 추어탕으로 이른 아침을 먹었다.  약 1시간 가량 이동하여 마천에서 출발, 문수암, 삼정산등을 순조로히 올랐다.참, 문수암 밑 에서는 산 뽕을 따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했다. 덥다고 반바지로 갈아 입고 저 멀리 보이는 촛대봉을 향해 콧 노래도 불렀다.
영선사 방향으로 갈까, 힘은 들지만 시간을 절약 하기 위해 등산 금지로를 택하느냐 로 잠시 설왕설래 했다.다수의 의사에 밀려 재곤형도 후자를 택했다. 이것이 아무도 짐작 못 한 불행의 단초였다.

정말 끝없는 산죽 밭이었다. 지리산은 산죽만 있냐고 할 정도 였다. 대잎이 길을 반 쯤은 숨기고 있었다. 길이면서 길이 아니었다. 팔과 다리는 대잎에 스쳐 쓰리고 아프다.풍광과  조망의 맛은 이미 없다. 단지 하늘, 그리고 대 숲 뿐이었다.  그래도 이때 까지는  여유가 있었다.더덕 냄새를 맡을 후각이 있었고 캐서 소주병에 넣으면 술  맛이 일품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으니. 얼마나 갔을까. 예정된 시간을 훨씬 초과 했기에 점심은 행동식이란다.그래도 우리는 이 길이 통상적인 등산로임을 의심치 않앗다. 여러 산악회의 안내 리본이 때 묻지 않고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드디어 산신령님의 장난이 시작된다.우선 재곤형의 다리에 쥐가  오른다. 그래도 선험자라 냉정을 잃지 않고 일른다. 원호야, 7시 까지는 세석 산장에 숙박 신청을 하여야  하니 몇몇과 함께 먼저 출발해라.이른바 선발대다. 원호형도 쥐라는 것 땜에 결국은 10시 도착 햇다지만.  우리는 탈수 초기 현상이 있는 상현과 덜 익은 홍시 같은 나의 등반 실력으로 늘어지기만 한다.  물없이 한 시간을 걷는다.
원만한 등반을 위해 봉식이가 1km 떨어진 연화천에 생명수를 구하러 가고 우리는 체력 회복이라는 미명으로 에너지(술)를 섭식한다.

결국은 6시 40분경 벽소령에 도착, 컵라면을 사 먹기로 한 것을 변경 , 밥을 해 먹고  휴식을 취 한후 야간 산행을 하기로 한다.

나는 빨간 지붕을 가진 벽소령의 우체통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누가 저기에 사연을 넣을까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청마는 우체국에서 그리운 이에게 글을 썼지만 이 첨단의 시대에 핸드폰을 못 쓸 지언정 엽서라도 넣을 세태가 아님에 빨간 우체통이  괜히  이물스럽다.
멋 일까, 낭만 일까, 실수 일까, 아니면 잉여 예산 집행일까? 대한민국 공무원이 어째 저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걱정은 유월의 구름 처럼 커지기만 한다.


7. 질량 불변의 법칙

진생이는  아직도 온기가 남은  찌개와 소주로 생환주를 마시잔다.향긋한 냄새가 있기에 뭐냐고 물어 보니 부산 엄마께서 보내주신 방아를 쬐금 넣었단다. 부추김치와 깻잎도 자랑 삼아 맛 보란다.

숙소에 가니 담요가 없다. 낭패다. 다행히 3시 인데도 일출을 보려는 등산객의 침구를 가져와 잠자리를 만든다.
"진하 형, 오늘은 정말 긴 하루 였네요."  그래,  정말 길고 기--이--   마무리 답도 못하고 나락으로 빠졌다.

눈을 뜨니 7시. 불과 4시간의 잠. 말 그대로 숙면이었나 보다. 몸도 마음도 가볍다. 진생이는 아직도 단잠이다.두어 마장 건너 재곤형, 원호형, 남수가 간밤의 일을 미안 한 듯 재미 있는 듯 웃으며 한창 꽃이 핀다. 한 잠 더 청하려다 남수가 형 잘 잤수? 하며 낭낭한 인사를 한다.그래 일어 나자.....
남수와 봉식이가 샘터에서 설겆이를 한다, 나는 담배를 빼 물었다.  
지리산행 중에 가능하면 담배 끊겠다고 마누라랑 약속 했는데. 허허....

누룽지 끓인 아침과 찌개, 가지가지 밑 반찬들. 원호형이 재회주라며  내 놓는다.  입안에 상큼한 맛이 남는 매실주다.
짐을 꾸리는데 모두들 불만(?)이다. 배낭이 줄지 않았다는 것이다.분명 전체적으론 줄긴 줄었을텐데 유독 자기 짐만 줄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질량 불변의 법칙이 작용하는가 보다.

마지막 여정인 청학동으로 향한다. 9시 30분 이다.
모두들 어제의 산행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웃고 또 웃는다.했살이 눈 부시다. 남은 여정이 힘들어도 어제 만큼이야 할라구.

다시 한 번 반추한다. 어제의 멋진 장면들을- 동고야, 동고애, 동고인을.



8. 선 후배 없다, 줄서라.

3시간후 한벗 샘에서 점심을 먹는다. 시간 절약을 위해 또 행동식이란다.막내 진생이는 라면을 꼭 먹어야 겠다고 강하게 의사를 표한다. 그래서 9명이 4개의 라면으로 식은 밥과 같이 먹기로 결정.
헌데 라면이 익어가고 냄새가 산자락을 피어나자 모두들 손에 무기를 들고는 식기가 등등하다. 절대 누구에게도 양보는 없다는 표정이다.  아니 어제의 동고야, 동고애, 동고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라면을 더 끓이자. 아예 밥을 새로 하자. 어쩌자. 중구난방이다.
이때 채근이가 한마디 한다. '선 후배 없이 줄서라. 혼자서 너무 많이 라면을 가져가지 말라. 국물도 아껴야 한다 (찬밥 말아 먹으려면)등 긴급 조치를 발표하고 0순위는 막내 진생이라고 한다. 어제밤 고생이 많았고 유일하게 라면을 먹자고 했기 때문이란다.  모두들 수긍한다.헌데 진생이는 입이 나온다. 두어 젖가락은 코끼리 비스켓이니까. 땡볕아래서 라면면을 헤아리듯 그렇게 먹어 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그 맛을  타인에게 형용 해 본 경험이 있는가?
대구서 온 등산객이 우습다고 배를 잡으며 라면을 적선하겠단다.


9. 산 신령님, 망월을 지켜주시옵소서.

삼신봉에 오른다. 세석에서 산행 5시간 만이다. 재곤형이 봉식이를 불러 숨겨둔 양주를 꺼내라고 한다. 제주는 원호형이라 하면서 모두 재배했다. 원호형이 고한다. 지리산 산신령님이시어 무사 산행을 해주게 하여 고맙습니다. 우리 망월 산악회의 발전과 무사고를 ....하며 진지한 표정이 된다. 저 멀리 지리산의 능선이 구비 구비 이어진다. 재곤형이 봉우리마다 이름을 말하며 우리의 산행 자취를 다시 깨우쳐 준다.  형제봉, 벽소령, 촛대봉, 천황봉등. 소스라쳐 놀랐다. 재곤형, 우리가, 아니 내가 간 밤에 저기를 지나왔다는 겁니까? 그-럼. 우리 모두 했지. 믿기지 않는다. 내가 19시간을 걸어온 , 어쩌면 생사를 가름 했을 수도 있는 그 산행의 본체가 저토록 웅장하고 장엄하고 길고 높았다니.
마치 나무 한 그루로 숲을 논하지 못 하듯 봉우리 몇개로 어찌 지리산을 말하랴. 하지만 삼신봉에서 본 그 봉우리며 그 대간의 시작점을 어찌 경외한 마음과 엄숙한 자세로 보지 않으리오.
시인도 묵객도 소설가도 모두 지리산을 온 갖 필설과 색채로 단장 했을지언정 어찌 나의 폐부에 박힌 이 느낌과 견주리오. 나는 단 한마디 말 뿐이외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산중에 누가 또 싱거운 소리를 한다. 신령님이 노했다고. 저거는 룸살롱에서 좋은 양주 마시고 나한테는 참이슬 빈통에 먹다 남은 술 갖고 왔다고. 또 누구는 지리산 신령님이 망월은 내 관할 아이다라고 하면 우짜노 한다. 개안타. 산신령 모임에서 우리 관할 신령님 한테 인사 하겠지 뭐.그라믄 된다. 초록은 동색이니께. 어쩌구 하며 분위기는 살겹다.

한시간을 더 걸어 청학동에 도착. 계곡의 물 소리, 한 줄기 바람, 전 굽는 냄새, 고향집에 온 듯 하다. 마당에 있는 평상에 사지를 눕힌다.  정갈한 채소며, 나물 반찬들과 백숙이 산해 진미처름 보인다.
주인 아낙은 귀한 손이 온 듯 우리를 귀히 대하고 누런 막걸리는 침을 삼키게 한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고담준론은 없었다만 화제는 끝없이 이어 진다.  누군들 취 하지 않으리오.
풍류의 흥을 돋우는 미인이 없었기에 다행히 우리는 막차를 놓치지 않았다.

속세와 단절한 48시간 동안 무슨 사연이 그리 많든고. 속세의 끈은 연방 울려댄다.
아, 우리는 점점 꿈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10. 아! 남해 낙조.

형님과 아우님들. 저 낙조가 보고 싶었다오. 방파제에 퍼질러 앉아 술 잔을 기울이며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오.
허나, 이제 이 몸은 꿈에서 깨어나 냉엄한 현실로 가야 합니다. 그대들 보다 한 발짝 먼저.
남해의 낙조와 바다 냄새는 서울 '먹자골목'에서 전해 받기로 하고요, 마음만 가득 담고서 썩는 냄새 진동하고 먼지 뿐인 세상으로 먼저 갑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