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지시때문에 바쁘게 썼습니다.
읽고 욕하지나 말아 주십시요.

1998년 4월 12일(음력 3.17) 17.2mm,
1999년 5월 3일(음력 3.17) 71.7 mm,
2000년 4월 19일(음력 3.15) 55.1mm,
2002년 4월 30일(음력 3.18) 58.5mm.
이상은 2001년을 제외한 최근 5년 간의 음력 3월 15일을 전후한 대전지역의 강수량 자룝니다. 대부분 가뭄 끝에 내린 단비라는 걸 자료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왜 이런게 나오냐고요? 궁금하시죠?
음력 3월 15일은 계룡산 신원사에 있는 중악단(中嶽壇)에서 산신제가 벌어지는 날입니다. 우리나라의 3대 영산(靈山)으로 일컫는 묘향산, 계룡산, 지리산에는 산신령님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었으며 묘향산의 제단을 상악단, 계룡산은 중악단, 지리산은 하악단으로 이름 붙였답니다. 지리산의 하악단은 일제시대 때 철거되었고, 묘향산의 상악단은 북한 땅이어서 현존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답니다. 계룡산의 중악단도 일제 때 철거되었다가 해방 이후에 중건된 것이랍니다.
가뭄이 계속될 때는 산신제를 올리면서 비를 내려달라고 빌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산신령 중에 가장 영험하다는 계룡산 산신령이 그 기도를 얼마나 잘 들어 주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기상청 자료를 검색해보았더니 거짓말처럼 거의 매년 음력 3월 15일을 전후로 단비가 내려주고 있었습니다.

계룡산은 그런 산입니다.
왕년에 거리의 약장사치고 계룡산에서 도 안 닦은 사람이 없었고, 미아리의 그 많은 점쟁이 중에도 계룡산에서 도안 닦은 사람 별로 없을 겁니다.
도봉산에서 사주팔자를 강의하시던 37회 최성태 선배님도 작명이나 운세 봐주는 걸 유료화 하려면 계룡산에 한 몇 년 갔다 오셔야 할겁니다.

오늘이 석가탄신일이라 계룡산 주변이 붐빌 것으로 예상하고 일찍 나섰습니다. 관사에 같이 사는 직원도 망월산악회 한번 가고싶다고 자발적으로 따라 나섰습니다. 이 친구 서울 집도 우리 집이랑 가까워서 산에 몇 번 같이 다니면서 망월산악회 이야기를 했더니 상당히 부러웠던 모양입니다. 제가 여길 나오면 제일 쫄따구에 속한다니까 믿기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이 날 제보다 아래 기수가 한 명도 없어 제가 제일 막내라는 걸 확인하고는 놀라더라구요.(우리 회사 산악회 나가면 제가 제일 노땅에 속합니다.)

박정자에서 버스에 오른 저를 많은 분들이 반겨주고 손 내밀어 악수도 청해주었습니다. 나도 이제 여기에 무릎정도는 빠졌구나 싶었습니다.
오르는 산길은 차라리 삼림욕장인 듯 숲이 울창하고 경사도 완만했습니다.
아 ! 벌써 잎이 이렇게 무성해졌구나.
계절이 가져다주는 자연의 변화는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잊고 있다가는 문득 계절이 약속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깨닫고는 숙연해할 때가 많습니다. 계절은 영겁을 통해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으나 인간은 그 중 겨우 몇 십 번에 지나지 않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만나고는 사라질 뿐입니다.
쉬임없이 오르다보니 선두의 원호선배가 보였고 원호선배님이 후미를 챙기러 뒤로 처진 동안 선두인 진하선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다보니 어느덧 남매탑.
남매탑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산행기 쓰느라 인터넷 뒤져서 찾았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한 스님이 이곳에 와 작은 암자를 짓고 수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었다. 스님이 입 속을 들여다보니 큰 가시 하나가 목구멍에 걸려있어 빼주었다. 그 며칠 뒤에 호랑이는 한 아리따운 처녀를 등에 업어와 놓고 갔다. 은공에 보답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처녀는 상주사람으로 혼인날에 호랑이에 물려 거기까지 오게되었다고 했다. 스님은 처녀를 집으로 돌려보냈으나 그 처녀의 부모는 이미 다른 곳으로 시집보낼 수도 없고 인연이 그러하니 거두어 주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스님은 그 처녀와 남매의 의를 맺고 비구와 비구니로서 수행하다가 한날한시에 열반에 드니 그 두 사람의 사리를 모신 것이 바로 이 탑이다.」

남매탑에서 나눈 이른 점심은 그야말로 가족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선후배 여러 기수가 하나로 둘러앉아 이 반찬 저 반찬 돌려가며 맛보이고,
이 친구 뭐 하는 사람이며, 저 선배 어제 누굴 만나 얼마나 마셨고...
참가인원이 적을 때는 나름대로 이런 장점이 있나봅니다.

잔뜩 찌푸려서 걱정되었던 아침하늘과는 달리 점심을 끝내고 주능선을 올라서는 우리에게 계룡산은 기다렸다는 듯 하늘을 열어 자기의 자태를 숨김없이 보여줍니다.
산행경력이 일천한 제게는 오늘이 처음 와보는 계룡산입니다.
처음 본 제 눈에 계룡산은 참으로 예쁜 산으로 비춰집니다.
남매탑을 뒤로하고 삼불봉, 자연성능을 거쳐 관음봉으로 가는 동안 탁 트인 시야에 산줄기들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였습니다. 계룡산의 산세는 북한산에 미치지 못하는 걸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저기 기암절벽은 설악산의 어디를 조금씩 떼어다 옮겨놓은 듯 예쁘고 아기자기한 짜임새가 범상치 않은 경관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굿마당에서 들었던 징과 꽹가리 장단이 들려옵니다. 소리마저 계룡산의 분위기를 맞춰줍니다.
자연성능 암릉길에 설치된 철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내려보니 아찔할 정도입니다. 이 암벽 중간에 사각창을 뚫고 대포를 앉히면 나바론의 요새 저리 가라 일겁니다.

관음봉은 계룡산의 큰 줄기 3개를 묶어 놓은 매듭입니다. 왼쪽으로 쌀개능, 쌀개봉을 거쳐 계룡산 주봉인 천황봉이 정상에 통신시설을 안고 손에 잡힐 듯 보입니다. 가까이 쌀개능의 기세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도의 주능선 등산로에도 이 구간을 점선으로 표시해서 험로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마 저 쪽에는 지금까지 온 것처럼 철계단이 별로 없나봅니다.
우리가 갈 길은 오른쪽으로 문필봉을 끼고 연천봉과의 갈림길에서 갑사로 하산이랍니다.

지도를 봤습니다. 그러고 보니 봉우리 이름들이 흥미롭습니다.
관음봉, 삼불봉은 불교용어 그대롭니다. 천황봉, 신선봉 같은 이름에는 도교적이거나 무속적인 냄새가 납니다. 문필봉, 쌀개봉, 갓바위 등에는 뭔가 유교적인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불교와 유교와 도교에 온갖 잡신까지 다 끌어안고 있는 계룡산의 특성이 여기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관음봉 바위 위에서 왁자지끌 사진 한판 끝내고 전망대 널찍한 팔각정에 둘러앉은 일행사이에 시덥잖은 대화가 오고갑니다.
"지금 한 시니까. 요 와서 밥 묵었으면 널찍하고 딱 좋았을 낀데."
"여기서 먹으면 밥 먹으면서 욕도 같이 먹을 것 같은데요."
"아이다. 밥은 묵지도 몬하고 욕만 실컨 묵을 끼다."
먹는다는 말은 참 다양하게 쓰입니다.

문필봉을 끼고 도는 시원한 숲길을 가다보니 금새 갈림길.
잠깐 망설이다 200m밖에 안 된다는 이정표를 보고 연천봉을 갔습니다.
연천봉을 안 가보고 그냥 오신 분 후회스러울 겁니다. 계룡산이 한눈에 보입디다.
앞으로 공주 쪽 들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뒤로는 중앙에 우리가 온 문필봉 관음봉이 겹쳐서 하나의 봉우리로 보이며, 좌우로 천황봉부터 삼불봉까지 계룡산 주능선이 또한 한눈에 들어오는 경관이 거대한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듯한 형상입니다. 좌우로 펼쳐진 주능선이 날개라면 우리가 서있는 연천봉은 독수리의 머리에 해당됩니다.
빨리 가서 다른 분들에게 가 볼 것을 권할까 생각했으나 몇 분 선배님들이 뒤따라오는 걸 보고 그만 두었습니다.
연천봉 정상 바로 아래 이런 산에서 보기 어려울 만한 큰 공터가 있고 거기에 밭을 갈아 놓은 게 보였습니다. 그 옆 연천봉 쪽에 붙여서 슬레이트 지붕의 가옥이 있는 걸로 봐서 무속인들이 도닦으면서 갈아먹는 밭인가 봅니다. 이 전에는 신도안에 저런 암자가 굉장히 많았는데 육군본부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철거되었답니다.

돌을 밟으며 내려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짜증스러운 모양입니다.
갑사로 내려가는 길은 대부분 돌로 되어 무릎이 부담스러운 사람이 많은가 봅니다. 저 역시 몇 번 무릎 아파 본 경력이 있어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중간 중간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만날 수 있어 시원한 물에 발 담그고 땀 닦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갑사에 거의 다왔습니다. 대자암에서 대성암으로 가는 넓은 길에서 대성암을 거치지 않고 왼쪽 좁은 길로 빠져서 갑사로 바로 가는 길이 있었습니다. 둘러보니 망월산악회 리본을 매어둔 게 눈에 띠었습니다. 이정표도 이 길을 갑사 가는 길이라고 알려주고 있으나 너무 낮게 설치되어 뒤에 오는 사람들이 못보고 지나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삼영이랑 한참동안 뒤에 오는 사람을 기다리니 원호선배님이 먼저 왔습니다. 역시 원호선배님은 확실한 산행대장입니다. 어제 답사를 왔었다는 것도 그렇고 여기서 큰길로 잘못 갈 우려가 있어 보이자 잘못가면 어디로 빠지는지 확인해야겠다며 주저없이 그 길로 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원호선배님을 갑사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 길이 대성암 거쳐서 갑사 가는 길이였답니다. 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넓은 길이였습니다.
삼영이가 말했습니다. 재곤이 선배님에게 지도 고치라고 이야기해야겠다고.

갑사 경내는 사람이 제법 붐볐으나 석가탄신일임을 감안하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규모가 크지는 않은 것 같으나 백제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역사에 걸맞게 고풍이 흐르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경내에는 이름과 주소를 적은 꼬리표를 단 형형색색의 연등이 제마다 소원을 담고 마당 가득히 하늘거리고 있습니다. 꼬리표 주소에 아파트 동 호수까지 적어 놓았습니다. 산타할아버지가 주소를 몰라 선물을 못 받을 것을 걱정하는 아이들 마음이 아닐까 싶어 빙그레 미소가 띠어집니다.
계룡산을 뒤돌아보았습니다. 큰산을 오른 후 언제나 느끼는 심정이지만 저기를 우리가 모두 넘어왔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필수코스 뒤풀이가 이어졌습니다.
같이 간 우리 회사 직원이 꽤 인기를 모았습니다. 삼영이가 점심 후 쓰레기 뒤처리를 혼자 해주었다고 소개하자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내가 막낸데 지가 안 할 수 있나...'
이 친구 넉살도 좋게 막걸리를 잘도 받아 마시고 권하곤 합니다. 다들 따뜻하게 대해주는 덕분에 경계심이나 낯가림 같은 건 일찌감치 던져버렸나 봅니다.
버스 속 뒤풀이 연장전을 위해 막걸리를 챙기는 선배님들이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우리는 거기서 헤어져야했습니다
우리가 탈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이 친구와 뒤풀이했던 식당에 다시 마주앉았습니다.
이 친구 자기네 고등학교 동문회장을 3년 간 했었답니다. 그 동안 자기가 줄곧 추구했던 동문회 분위기가 바로 오늘과 같은 분위기였답니다. 자기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않더라는 겁니다. 학교가, 그리고 그 학교 교풍이 그렇게 만드는 거라면 자기네 동문회는 영원히 이런 분위기를 만들 수 없을지 모른다며 우울해 했습니다.

이날 우리가 한가지 빠트린 게 있다는 거 아십니까? 교가랑 응원가를 안 했습니다.

모두들 잘 가셨는지 궁금합니다. 또 한잔 더 하신 팀도 있겠죠?.
상기하십시다. 심한 뒤풀이는 좋았던 산행을 후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