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만에 나타나서 망월산악회에 신고하는 마음으로 몇 자 적어봅니다.

나이가 불혹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몸이 영 이전 같지 않음을 느끼는 건 우리같이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현상이리라 위안을 해보지만 날이 갈수록 이거 정말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허리띠 구멍을 자꾸 더 뚫어야거나, 술 먹은 다음날 일어나기 어려운 건 그렇다 치더라도 새벽거봉이 없어지면서 밤이 무서워지는 건 정말 심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에서 그 나이에 가장 적당한 운동은 골프밖에 없다고 하였으나 골프와 스키는 대한민국에서 없어져야할 스포츠종목이라고 주장하던 내가 선뜻 골프를 시작할 수는 없었습니다.
골프장과 스키장이 산을 갉아먹는 모습이 너무 흉측하고 안타까왔기 때문입니다.(제가 누굽니까? 환경관리공단에서 십 년 넘게 녹을 먹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새로 생긴 업무 때문에 판교의 청계산기슭 숲 속에 자리잡은 아담한 건물에 사무실을 얻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 건물 부속 골프연습장이 있어 공짜로 써도 된다지 뭡니까.
그래도 처음엔 안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그런데 말입니다. 대학교수로 있는 친구 하나가 자기가 쓰던 거라며 연습 좀 하라고 골프채 한 세트를 그냥 주더라고요.
못이기는 척하고(아니 진짜 못 이겨서)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재밌습디다. 한 몇 달 코치까지 초청해가며 미친 듯이 빠졌습니다.
머리도 얹었습니다.
골프채도 새로 장만했습니다. 딥다 비싸던데요.
필드도 여러 번 나가 봤습니다.
그런데 이거 돈 들어가는 게 장난이 아닙디다. 18번 홀까지 보다 19번 홀에 돈이 더 많이 들 때도 많구요.
돈 들어가는 게 무서워지니 은근히 공짜라운딩 안 생기나 기대하게 됩디다. 사람 치사하게 변하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운동도 별로 안되더라고요.
때려치웠죠.

그 전에 증규가 등산가자고 몇 번 꼬셨댔습니다.
내가 등산가 본 지가 얼마나 됐나?
국민학교 때 : 영도산은 여러 번 갔었지....
중학교 때 : 기억에도 없고....
고등학교때 : 캠핑간다고 보경사, 표충사, 쌍계사 등을 열심히 다녔지만 물좋고, 그늘좋고, 여학생 많으면 아무데나 퍼져서 며칠을 놀다 돌아 왔었지....
무얼라고 힘들게 산정상까지 올라가느냐고 생각했던지라 등산을 옳게 해봤을 리 없고....
참!!! 고등학교 수학여행 설악산. 그 때 상갑이에게 브레이크 다운 배운 거는 생각나는데 우리가 산에 갔었나?
대학 때 : 등산에 미친 지도교수 땜에 그 지긋지긋했던 치악산을 억지로 갔었지....
그때 내가 원주 1하사관학교 출신이라 치악산은 자신있다고 설치다가 길을 잃어버려 개창피 당했었지....
등산로가 아닌 훈련받을 때 각개전투장으로 갔더니 거기 다음부터는 왜 그리 길이 영 보이질 않던지....
그 외에 야유회로 도봉산하고 소요산 정도는 간 것 같은데 소요산은 주막에서 죽치고 앉아 올라가지도 않았던 것 같고...
대학원 때 : 지리산. 이 때 피아골 잘못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며 힘들어 죽을 뻔했지....
회사에서 단체로 간 설악산. 오색에서 대청봉 넘어 천불동계곡으로 내려갔었지....
이게 전부구나. 그래도 마지막 하나는 등산 같구나.

아니다!!  이런 일이 한번 있었습니다.
상계동 살 때 2월달 이였을 겁니다. 며칠 전 눈이 왔었다는 것을 생각지도 않고 아이젠도 없이 운동화신고 마누라가 싸준 김밥 한 줄에 생수 한 통 달랑 들고 수락산을 보람아파트에서 올라 정상까지 갔다가 돼지게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동네산이라고 우습게 보고 눈길이 미끄러운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강행군했다가 미끄러져 넘어지기를 수십 차례. 옷이랑 신발이 모두 눈과 흙탕에 젖어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정상까지 갔었습니다.
힘들었어도 거기까지는 괜찮았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헤매다 지치고 배고파서 바위 밑에 쭈그리고 앉아 얼어붙은 김밥을 꾸역꾸역 집어 삼켰습니다.
그렇게 배가 고팠어도 얼어붙은 김밥은 먹기가 여간 아니였습니다.
허기를 채우고 무작정 아래를 향해 내려온 것이 지금의 당고개 부근 이였던 것 같습니다.
집으로 가려고 택시를 잡았을 때 내 꼬락서니를 쳐다보는 기사아저씨 눈빛이 이상했었습니다.
맑은 날에 옷이 온통 흙탕인 사람이 자기 차를 타니 시트 버릴까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었습니다.
정말 제 꼴이 말이 아니였습니다.
좋은 교훈 이였습니다. 김밥을 너무 차갑게 하면 먹기가 어렵습니다.

몇 년 전부터 마누라가 살 빼느라고 남한산성을 부지런히 다니면서 저더러 하도 같이 가자고 졸라대서 마지못해 몇 번 갔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장천 경사길 올라가다 숨막히고 가슴아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 짖거리를 왜하는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쯤인가? 숨이 덜 막히고 가슴이 안 아프더라고요.
그 다음 번에 손위 동서랑 같이 갔는데 이 양반 이전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숨막혀서 몹시 괴로워하더군요.  이 때 저는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띠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뭐 이 정도가지고 이렇게 헤매?"
자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관악산도 가보고 검단산도 가봤습니다.
역시 가슴은 안 아프더라고요. 오히려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이 정도 수준이 되어있을 때 증규가 꼬셔온지라 그래 한 번 가보자 했습니다.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망월산악회 산행이 관악산에서 있다해서 갔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횐가 하는 곳 뒤로 올라가는 코스였는데 마누라랑 애새끼 챙겨가느라 늦게 도착했더니 모두들 올라가고 없더군요.
늦었어도 올라가 보자 해서 부지런히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면서 보니 할아버지들이 잔뜩 가는데 지나가면서 들어보니 틀림없이 동고 선배님 같았습니다.
"아이고 저런 할배들하고 어떻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래도 선배님들인데 싶어 말을 붙여 보려 했으나 연배가 너무 차이나는 것 같아 어려워서 말도 못 붙여보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불과 몇 년 전이지만 이때만 해도 저는 제 자신이 영계라고 생각하며 살았거든요.)
그 다음달이던가 청계산 산행이 있다해서 갔는데 증규 이 자식 너무 늦어 오다가 돌아갔던가 그랬을 겁니다. 아는 사람도 하나도 없고 해서 입구에서 등록만 하고 그냥 돌아와 버렸습니다.
나도 참 한심한 놈입니다.
그래도 등록해 놨다고 산행안내문이 꾸준히 옵디다.
정성이 갸륵해서 북한산 한 번 가줬죠.
증규, 삼영이, 남수,  또 있었나? 엄정행 선배님이 교가 지휘를 했던 게 기억납니다.

그리고는 골프에 빠졌죠. 그래서 등산을 갈 수가 없었죠.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등산을 가게 해준 것 또한 골프였습니다.
작년 여름 이였습니다. 그동안 골프에 돈을 아낌없이 퍼준 덕분에 여름휴가가 다가오자 주머니 걱정이 엄청되더라고요.(증권에 날려먹은 것도 있지만....)
꾀를 냈습니다. 마누라가 제법 산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때라 이번 휴가 때는 지리산 종주를 하는 게 어떠냐고 꼬셨습니다. 마누라는 순진하게도 내 꾀에 쉽게 넘어가 주더군요.
지리산 종주하며 깨달았습니다.
"이건 내가 내 꾀에 넘어 간거다"
겨우 남한산성 몇 번 갔다온 실력으로 2박3일, 그것도 먹을 거, 입을 거 마누라꺼 까지 배낭에 잔뜩 메고 지리산에 덤비다니....
성삼재에서 점심먹고 출발해서 뱀사골산장에서 1박할 때까지 만해도 휫바람불며 갔습니다.
부슬부슬 비가 제법 왔으나 가져간 판초로 때우며 지리산은 원래 그래 하면서 마누라에게 거만을 떨었습니다. 구름 속에 몇 십 미터 앞이 보이지 않아도 내일은 괜찮겠지 하면서 갔습니다.
뱀사골산장에서 밥해먹고 소주까지 한잔하고 눅눅한 등산화에 신문지 구겨넣고 여유부리며 잠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도 종일토록 구름은 걷히지 않고 때때로 강한 비가 걸음을 멈추게 만들곤 했습니다.
그래도 지천으로 널린 야생화를 감상하는 즐거움으로 견딜 수 있었습니다.
세석평전에 다달았을 때 구름 속에서 전투기 수백 대가 우리를 향해 기총소사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맞는 것이 이렇게 아플 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판초는 되려 짐만 되더군요. 방수 잘되는 등산화가 발의 때를 불리는 욕조로 쓰일 수도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세석산장에 도착했습니다.
추위가 밀려왔습니다. 아래 윗 이빨이 얼마나 세게 부딪히는지 잇몸이 다 얼얼해지더군요. 내 의지로 멈추어 보려고 힘을 주어도 주인을 배신한 로봇처럼 완전자동으로 제멋대로 덜덜거리더군요.
한기가 온다며 나를 바라보는 마누라의 눈빛이 그렇게 애처로울 수 없었습니다.
호텔처럼 잘 지어졌다는 세석산장의 마루는 홍수를 피해 수재민들이 대피해 있는 국민학교 교실과 다를 바 없더군요.
제가 마누라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산장직원에게 애걸복걸하여 담요 한 장 얻어와 덮어주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비가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해서 아수라장 같은 취사장에서 뜨거운 밥 한 그릇 만들어 먹으니 얼었던 몸이 풀려오고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잠자리에서 잠을 청하다 문득 욕조가 된 등산화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 걸 아침에 신고 나갈 생각을 하니 차라리 마를 때까지 여기 사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산장직원에게 신문지를 구할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산꼭대기에 그런 게 어딨겠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일단 등산화를 엎어놓고 잠을 청했습니다.
새벽3시 잠에서 깨어 꼬마프래쉬를 들고 지하에 있는 창고로 숨어들었습니다. 문이 잠겼더군요. 창고 옆에 또 하나 문이 있어 열어보니 보일러실 이였습니다. 들어가 보니 거기가 바로 창고 겸 보일러실 이였습니다. 저 쪽 보일러 위에 신문지 한 뭉테기가 보였습니다. 주저없이 챙겨 나오는데 앵글로 된 선반 위에 등산객들이 두고 간 것으로 보이는 통조림이니 부탄가스니 하는 것들이 눈에 띄였습니다. 잠깐 망설이다 고추참치 하나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안 망설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발에 신문지를 구겨넣고 젖은 내의도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베게삼아 베고 누우니 새로운 희망이 솟는 것 같았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지리산이란 이런거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비는 그쳤으나 구름은 여전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젖은 신발을 신고 나서는 사람보다 오만 배쯤 행복하다며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출발하고 두 시간쯤부터 오른쪽 무릎이 아파 오는 게 아닙니까.
절뚝거리며 장터목까지 왔더니 모두들 그 다리로 천왕봉은 무리라며 포기하라는 겁니다.
"아!! 천왕봉이 눈앞인데!!"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었습니다. 고마운 노부부에게 무릎보호대를 얻어 찼습니다.
배낭은 산장에 맡겨두고 나무작대기 하나 주워서 지팡이 삼고 천왕봉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무정한 지리산은 그렇게 힘들게 천왕봉에 올라선 우리를 한치 앞도 볼 수 없도록 구름 속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너무 아쉬웠습니다.
'어떻게 올라온 정상인데....  언제 또 올지도 모르는데....'
하산길에 무릎통증은 더욱 심해져서 아차 잘못 발을 디딜 양이면 눈물이 찔끔거릴 정도로 아팠습니다.
배낭은 마누라가 모두 졌습니다. 장터목에서 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리고 무게를 줄이긴 했지만 마누라에게 체통이 영 말이 아니였습니다.
천왕봉에서 백무동까지 내려오는데 무려 7시간이나 걸렸습니다.
휴가비 몇 푼 아끼려다 오만 고생 사서 한 꼴 이였습니다.
내가 내 꾀에 넘어갔다는 생각을 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내가 이 정도 밖에 안되나 싶어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산에 한 번 다녀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한달 뒤 오대산을 갔습니다. 또 구름 끼고 보슬비가 왔습니다. 또 무릎이 아팠습니다. 또 화가 났습니다.
또 한달 후 고대산을 갔습니다. 또 비가 오더군요. 무릎은 안 아팠습니다.
저는 지지리도 재수도 없는 놈이구나 생각했습니다. 큰산에만 갔다하면 비가 오거나 구름 끼어 버리니까요.
또 한달 후 회사 산악회랑 설악산을 갔습니다.
무박으로 오색에서 백담사로 넘었습니다. 구름은 옅었지만 단풍이 끝났더군요.
가지고 간 무릎보호대는 다른 직원에게 주었습니다. 에어신신파스도 가지고가서 하산 후 내 다리에도 뿌리고 직원들에게도 뿌려 주었더니 철저한 준비에 감탄하며 차기 산악회장으로 추대하겠답니다. 물론 거절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너거도 무릎 한 번 아파봐라 저절로 그래 될끼다"
또 한달 후 동대문 안내 산악회 따라 소백산에 갔습니다. 눈을 보러 갔는데 눈이 다 녹아버려 없더군요.
한 달쯤 뒤 강원도 지방에 눈이 많이 왔다는 뉴스를 보고 급하게 계방산을 갔습니다. 눈이 엄청나더군요. 상고대라는 것도 처음 보았습니다.
수락산에서 눈길에 고생했던 생각이 나더군요.
짬짬이 검단산 예봉산 남한산성도 여러 번 갔습니다.
그 동안 산에 다닌 것만도 그 이전에 일평생 다닌 것보다 많았습니다.

3월에는 산불방지 때문에 국립공원 주요 등산로를 통제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지에 가면 방법이 있겠지 하고 주왕산을 갔습니다. 내원동 마을까지는 통제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전기없는 마을이라는 내원동 초입 옛날 분교자리에 있는 집에 민박을 정하고 정탐을 했습니다. 감시원에게 물어 봤습니다. 아침에 몇 시에 출근하냐고. 9시쯤 나온 댔습니다.
민박집에서 산중약차 한 사발 시켜서 맛보고 저녁 끓여 먹고나니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도시에서는 3월 기온이 예년보다 훨씬 높아 초여름 날씨 같다고 떠들썩인데 여기 산중에서는 아직 한겨울 이였습니다.
은은한 달빛에 펼쳐진 산중마을의 풍경이 새삼 정겨웠습니다. 이런 달빛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인가 싶었습니다. 온 몸에 음기를 충전시키고자 마을길을 천천히 거닐었습니다. 9가구가 사는데 전기없는 마을이라고는 하나 태양열 발전으로 축전지를 충전시켜 전기를 쓰고 있는 집이 두 집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전기없는 마을은 더 이상 없는가봅니다.
전기없는 산중의 밤은 정말 할 일이 없었습니다. 텔레비젼이 있나 라디오가 있나. 민박집 식당에 촛불 밝혀놓고 술 마시는 일밖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분위기는 끝내주던데요.
가져간 소주 다 마시고 모자라 민박집에서 담근 머루주 한 통을 주문해서 맛을 보니 이게 또 죽여주더라고요.
장작불 넣은 방바닥에 몸을 지지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을 일찍 끓여먹고 감시원이 출근하기 전에 감시초소를 통과했습니다. 주왕산국립공원 깊숙이 주왕산보다 더 높은 가메봉을 올랐다 제2폭포로 내려 왔습니다.
산행동안 우리 일행말고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조용했습니다. 인기척 같은 게 나면 오히려 섬짓한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등산로도 한 달 가량 사람들이 밟지 않아 흙이 얼음에 들떠있어 밟을 때마다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게 감촉이 아주 좋았습니다.
좀 무섭기도 했지만 성공적으로 내려오고 나니 정말 기분이 짱 이였습니다.
주왕산을 다녀온 후 몸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고개숙인 남자가 새벽거봉을 시작한 겁니다.
마누라는 이 사람이 혼자 몰래 뭘 먹고 와서 이러냐면서 즐거운 비명을 질러 댔습니다.
저도 왜 이러는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전기없는 마을에서 먹은 산중약차 효과일까? 머루주 때문일까?
아니야 그동안 꾸준히 산을 다닌 효과가 나타난 걸꺼야.
의사 선생님 같은 답을 만들어 놓고 보니 제 자신이 대견스러웠습니다.
골프를 계속 쳤어도 이랬을까? 그 답은 분명히 NO 였을 겁니다.

스카이 송에게서 메일이 왔습니다. 4월 7일 망월산악회 북한산 산행이 있다는 거였습니다.
몇 년만에 나와보니 망월산악회를 보는 제 시각이 달라져 있음을 느꼈습니다.
전에 나왔을 때는 별로 할 일없는 할배들이나 힘있는 선후배 잘 사겨서 사업에 보탬이 되게 해 보려는 사람들이 그냥 어울려 다니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회사 산악회도 따라가 보고 동대문 안내산악회도 따라가 보고 식구들 데리고 가 보기도하고 혼자 고독을 즐기며 다녀 보기도한 나의 경험으로 이거 한 가지는 깨달았습니다.
다수인을 위한 산행을 계획하고 안내하고 뒤처리한다는 것이 많은 경험과 실력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망월산악회에서 많은 경험과 충분한 실력이 있는 분들이 별도의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닌데 성심으로 봉사하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안내산악회 대장을 해도 충분할 분들이 늘 나와서 선배를 모시고 후배를 챙기는 게 보였습니다.
'그냥 산이 좋아서, 그냥 동고가 좋아서' 라고 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삼영이도 그런 선배의 대를 잇기 위해 암벽도 타며 열심히 실력을 갖추어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남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성경같은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 이였습니다.
나는 오직 새벽거봉만을 위해서 나 혼자 그렇게 열심히 다녔던 것인가? 부끄러웠습니다.
승기나 택갑이 증규 모두 많이 참가할 수 있게 연락들 하느라 바쁜 시간을 쪼개고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얼까? 열심히 참가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야산에 또 따라 나섰습니다.
새벽 한 시에 경부고속도로 변에 홀로 서 있어본 경험도 새로 생겼습니다. 기분도 야릇했습니다.
가야산에 올랐습니다. 지금까지 산에 다닌 중에 이렇게 날씨가 좋은 적이 없었습니다. 동쪽으로는 옅은 운해가 발아래 깔려있고 서쪽으로는 더할 수 없이 쾌청한 하늘이 열려 있었습니다.
서쪽으로 덕유산, 남서쪽엔 지리산... 한반도 남쪽의 큰 산들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리산은 역시 영산인가 봅니다. 그 맑은 하늘 가운데 오직 지리산 머리에만 구름덩어리를 이고 있는 게 아닙니까. 저 구름 때문에 작년 여름 그렇게 서운한 가슴을 안고 천왕봉을 내려와야 했었구나 싶었습니다.
가야산 정상에 교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우-람 히이- 구우- 비쳐 온----"
울컥 콧등이 시큰해 왔습니다. 동고야도 외쳤습니다. 가슴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거 할라꼬 산에 다닌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근교 산행에 참가했을 때와 달리 훨씬 가족적인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선배들 묵사발 만들어 줄려고 집에서부터 계획적으로 준비해온 후배도 있었습니다. 원행에 처음 참가한 제가 낯설어 할까봐 여러 가지로 배려해주시는 선배님들의 후의가 고마웠습니다.
내가 왜 지금까지 여기에 섞이지 못하고 혼자 헤매고 다녔을까 후회가 막심합니다.
앞으로는 열심히 따라 다니려고 이 글로나마 신고 드립니다.

지루한 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