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以不變 應萬變, 民不信無立(이불변 응만변, 민불신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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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나그네 |
작성일 | 2013-09-11 |
(월남근세사 요약도 되니 동영상도 보시고, 다소 길어도 끝까지 읽기를 권하는 바 입니다.) ㅇ.그는 말과행동이 언제나 일치했던 정치가. 일국의 수장보다는 평생 '호 아저씨'로 남고 싶어했던 정치가. 뛰어난 군사 전략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인물. 6개국어를 사투리까지 구사하는 지식인. 유일하게 세계최강국을 이겨본 단1人이다. ㅇ.이불변 응만변(以不變 應萬變) 내 안의 변하지 않는 원칙으로 만변하는 세상에 대응하자 ㅇ.민불신무립(民不信無立) 인민이 믿지 않는다면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 정치가는 국민에게 항상 진실해야한다 혁명을 하고도 국민이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호치민의 유언) 첫째. 나의 무덤을 만들지 말고 화장하며, 동상을 만들지 말라.
매장하여 무덤을 만들면 인민들에게 폐를 끼칠것이며, 동상을 만들면 우상화되거나 신격화될 위험이 있다. 둘째. 전쟁이 끝이나더라도 남월남의 누구에게라도 보복하지 말라. 모두가 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하여 처신한 것이며, 모든 남월남의 인민들도 새로운 통일베트남의 새국민으로 새출발을 하자. 세째. 전쟁중에 전사한 군인들의 아내나 가족에게 국력을 다하여
성심성의껏 지원하고 돌봐줄것이며, 상이군인들 역시 국가가 최대한 우대하여라 1969년 사망한 호치민의 머리맡에는
생전에 애독했던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가 놓여 있습니다. 호치민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절 다른 소지품은 못 챙겨도 목민심서 만큼은 꼭 챙겼을 정도로 목민심서를 아꼈습니다. 덕분에 목민심서는 베트남 공무원들의 지침서로 채택되었습니다 다산은 이 책을 통해 관리의 청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목민심서의 2장 '율기육조(律己六條)'에서는 “청렴은 관리의 본분이요, 갖가지 선행의 원천이자 모든 덕행의 근본이니 청렴하지 않고서는 목민관이 될수없다” “자신이 쓰는 돈이 백성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것이란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 “부를 탐하는 수장은 그 아랫사람들까지 축재만을 일삼게 되며, 이는 곧 국민의 피를 빨아먹는 도적떼와 같은 존재이다 ” 목심심서를 자신의 몸처럼 아꼈던 호치민은 다산 정약용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호치민은 사망할 때 지팡이 하나와 옷 두벌,
목민심서를 비롯한 책 몇 권만을 유품으로 남겼습니다 (호치민의 일생) 1883년 프랑스의 무력 침공으로 식민지가 된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의 가혹한 식민 통치 아래 철저하게 수탈당했고, 국가 경제의 자생력을 잃어 갔다. 1890년 프랑스 지배를 받던 베트남 상류층 명문가의 막내 아들로 출생.
그의 아버지는 핍박 받는 베트남 백성들을 위해 공무원 직을 사퇴하고 전국을 떠돌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집안은 몰락했지만 지적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교 경전과 프랑스어를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개혁적 성향을 본받아 프랑스의 가혹한 세금제에 저항하는 등 반체제 인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프랑스 본토에 만연돼 있던 자유주의와 급진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 1차 대전 후 유럽으로 건너간 베트남 인들은 그곳에 만연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혁명 사상에 감화를 받고 귀국해 베트남의 독립 운동을 이끌기 시작했다. 이들은 프랑스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지하에 숨어 들어
국민들을 계몽하며 게릴라와 테러 전을 수행한다. 인텔리와 청년 혁명가들이 주도한 이런 일련의 지하 독립운동은 이후 프랑스와 미국을 무찌르는 원동력이 된다. 호치민은 (그의 본명은 ‘Nguyen Ai Quo’라 함. 호지명은 깨우치는 자라는 뜻) 1911년 배 막노동꾼으로 취업해 프랑스로 건너간다. 파리에서 사진 보정 기술자로 일했고, 새로 창설된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다. 이곳에서 체계적인 독학을 통해 방대한 지식을 터득했으며 혁명사상과 애국주의를 체득한다. 1919년(우리나라 기미 3.1만세운동)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저지른 만행과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는 요구서를 넘겨 주려다 실패하고 말았는데, 그는 여기서 서구 열강들이 결코 평화적으로 식민지를 넘겨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 그는 동양의 공산 혁명가 중 가장 화려한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세계 공산당 대회에서 제법 큰 발언권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소련으로 건너가 레닌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나라의 박헌영,김단야,주세죽등과 같이 수학하였다) 민족과 식민지 문제 연구소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호찌민은 영어,불어,러시아어,중국어,일본어등의 사투리도 할 수있는 실력의 인테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상 청렴하고 검소하며 대중과 함께 꼭 같이 생활하였다) 실력을 보인후 공산당의 비밀 요원으로
랑군과 캘커타 등지에서 활약하게 되면서 당시 그는 첩보전과 교란에 발군의 였는데, 귀신 같은 변장과 잠적으로 수없이 많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기록됐다. 1925년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을 위해선 먼저 지식인과
청년들을 대중 속에 보내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베트남 혁명 청년동지회를 결성한다. 그리고 1929년에는 홍콩에서 인도차이나 반도 공산당을 결성, 군대를 모으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베트남 독립 운동의 주도권은 호치민이 지도하는 공산당으로 넘어간다. 1940년 2차 대전이 발발한 뒤 일본군이 베트남으로 진군,
베트남을 지배하던 프랑스 정권을 격퇴한다. 초기 베트남 인들은 일본을 해방군으로 오인했으나, 호치민은 일본 역시 제국주의자들과 한패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베트남 독립전선을 조직, 일본군에 저항한다.
그러나 그의 게릴라 부대는 일본군에 패배를 거듭했다. 이때 호치민은 자신의 공산주의 노선을 변경한다.
지주의 재산을 몰수해 농민에게 분배하는 전형적인 공산 혁명이 아니라, 제국주의자와 매국노의 토지만 몰수해 빈농에게 배분하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베트남의 기득권 및 지주층에게 이대로 식민지배가 계속되면 결국 베트남 인 모두가 공멸할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이때부터 그의 게릴라 전술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1945년 호치민은 패망해 가던 일본군을 베트남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마침내 독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독립의 기쁨도 잠시, 쫓겨났던 프랑스 군대가 질서 유지를 보조한다는 명분 아래 베트남을 재침략 한다. 1946년, 프랑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호치민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 1명이 죽을 때마다 베트남인 10명이 희생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들은 패배할 것이고 우리는 이길 것이다." 말은 현실화 되었다. 프랑스는호치민의 2차 대전에서 맹위를 떨친 비행기, 장갑차, 대포등의 막강 화력을 몰고 왔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프랑스 군은 패색이 짙어 갔다. 호치민의 군대가 이미 거의 모든 민중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호치민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농민들은 게릴라 부대에게 식량을 가져다 주었고, 도시의 시민들은 프랑스 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프랑스 군대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1954년 베트남 군은 총반격을 개시,
디엔 비엔 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궤멸시키고 프랑스는 8년간의 전쟁 끝에 남부 베트남에 괴뢰 정부를 남긴 채 완전 철수 한다. 호치민은 이제 베트남 민중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굳은 결의로 베트남을 독립된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던 미국은 베트남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미국은 1955년 프랑스를 섬기고 있던 베트남의 꼭두각시 황제
바오 다이를 몰아 내고, 고 딘 디엠을 남 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삼아 새로운 남베트남 정권을 세운다. 그러나 딘 디엠의 남베트남 정권은 수많은 실정과 부정을 저질러 끊임없는 민중 봉기와 쿠데타를 겪어야 했고 붕괴 위기에 놓인다. 미국은 남베트남의 위기를 북베트남의 침략과 공작으로 규정,
남베트남의 민주주의와 자결권을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 전을 일으킨다. 미국은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베트남의 통킹만에 주둔하고 있던
미 구축함을 폭파시키고, 베트남 군의 어뢰에 맞아 침몰했다고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 (일명 “통킹만 사건”일본의 만주사변 명분으로 조작한 '노구교사건'과 같음) 호치민의 군대는 소련이 지원한 전쟁 무기와 전국민의 지지 기반으로 미군을 쉴 사이 없이 괴롭혔다. 프랑스 군대와 싸울 때 발휘되던 게릴라 전술은 힘을 더했다. 호치민의 군대의 정말 무서운 점은 포용력이었다. 이미 거의 모든 베트남 인들을 지지자로 만든 호치민은
미군 측에 붙어 자신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동포마저도 포용했다. 호치민의 해방전선은 자신들의 포로가 된 이들까지 용서하고 설득해 결국엔 남베트남 군이 미군의 등에 총을 쏘게 하는 결과를 이끌어 낸다. 1969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의 시체 때문에 한 뼘의 농지도 낭비할 수 없다며, 화장 시켜 작은 단지 안에 담아달라고 한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영구보존 처리하여 웅장한 묘소에 안장하였다(금번 박근혜 대통령 참배) 1973년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 후 베트남에서 전면 철군한다. 그리고 호치민이 죽은 지 6년 뒤인 1975년, 그가 이끌던 군대는 사이공을 점령하고 괴뢰정부 남베트남을 궤멸시킨다. 이로써 완전한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한다. ![]() 박근혜 대통령이 9일 하노이에 위치한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를 찾아 헌화했다. 박 대통령이 묘소 입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라고 쓴 리본의 끝을 조화에 붙이고 있다. 리본 끝을 조화에 붙이는 것은 베트남의 전통 헌화 예절이다. 조화는 베트남 토종 국화과 식물인 `호아따이방`으로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 역사의 화해' 매듭을 풀면서,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 주석께선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변화하는 것에 대응한다’는 뜻의 ‘지벗비엔 응번비엔(以不變 應萬變)’이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우정과 신뢰가 변치 않는다면 어떤 변화와 도전도 능히 함께 대응해나갈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 박근혜 대통령이 9일 하노이에 위치한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를 찾아 헌화했다. 박 대통령이 묘소 입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라고 쓴 리본의 끝을 조화에 붙이고 있다. 리본 끝을 조화에 붙이는 것은 베트남의 전통 헌화 예절이다. 조화는 베트남 토종 국화과 식물인 `호아따이방`으로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 역사의 화해' 매듭을 풀면서,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 주석께선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변화하는 것에 대응한다’는 뜻의 ‘지벗비엔 응번비엔(以不變 應萬變)’이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우정과 신뢰가 변치 않는다면 어떤 변화와 도전도 능히 함께 대응해나갈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미 거의 모든 베트남 인들을 지지자로 만든 호치민은
미군 측에 붙어 자신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동포마저도 포용했다. 호치민의 해방전선은 자신들의 포로가 된 이들까지 용서하고 설득해 결국엔 남베트남 군이 미군의 등에 총을 쏘게 하는 결과를 이끌어 낸다. 1969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의 시체 때문에 한 뼘의 농지도 낭비할 수 없다며, 화장 시켜 작은 단지 안에 담아달라고 한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영구보존 처리하여 웅장한 묘소에 안장하였다(금번 박근혜 대통령 참배) 1973년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 후 베트남에서 전면 철군한다. 그리고 호치민이 죽은 지 6년 뒤인 1975년, 그가 이끌던 군대는 사이공을 점령하고 괴뢰정부 남베트남을 궤멸시킨다. 이로써 완전한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한다. ![]() 박근혜 대통령이 9일 하노이에 위치한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를 찾아 헌화했다. 박 대통령이 묘소 입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라고 쓴 리본의 끝을 조화에 붙이고 있다. 리본 끝을 조화에 붙이는 것은 베트남의 전통 헌화 예절이다. 조화는 베트남 토종 국화과 식물인 `호아따이방`으로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 역사의 화해' 매듭을 풀면서,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 주석께선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변화하는 것에 대응한다’는 뜻의 ‘지벗비엔 응번비엔(以不變 應萬變)’이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우정과 신뢰가 변치 않는다면 어떤 변화와 도전도 능히 함께 대응해나갈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 박근혜 대통령이 9일 하노이에 위치한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를 찾아 헌화했다. 박 대통령이 묘소 입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라고 쓴 리본의 끝을 조화에 붙이고 있다. 리본 끝을 조화에 붙이는 것은 베트남의 전통 헌화 예절이다. 조화는 베트남 토종 국화과 식물인 `호아따이방`으로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 역사의 화해' 매듭을 풀면서,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 주석께선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변화하는 것에 대응한다’는 뜻의 ‘지벗비엔 응번비엔(以不變 應萬變)’이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우정과 신뢰가 변치 않는다면 어떤 변화와 도전도 능히 함께 대응해나갈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1954년 베트남 군은 총반격을 개시,
디엔 비엔 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궤멸시키고 프랑스는 8년간의 전쟁 끝에 남부 베트남에 괴뢰 정부를 남긴 채 완전 철수 한다. 호치민은 이제 베트남 민중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굳은 결의로 베트남을 독립된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던 미국은 베트남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미국은 1955년 프랑스를 섬기고 있던 베트남의 꼭두각시 황제
바오 다이를 몰아 내고, 고 딘 디엠을 남 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삼아 새로운 남베트남 정권을 세운다. 그러나 딘 디엠의 남베트남 정권은 수많은 실정과 부정을 저질러 끊임없는 민중 봉기와 쿠데타를 겪어야 했고 붕괴 위기에 놓인다. 미국은 남베트남의 위기를 북베트남의 침략과 공작으로 규정,
남베트남의 민주주의와 자결권을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 전을 일으킨다. 미국은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베트남의 통킹만에 주둔하고 있던
미 구축함을 폭파시키고, 베트남 군의 어뢰에 맞아 침몰했다고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 (일명 “통킹만 사건”일본의 만주사변 명분으로 조작한 '노구교사건'과 같음) 호치민의 군대는 소련이 지원한 전쟁 무기와 전국민의 지지 기반으로 미군을 쉴 사이 없이 괴롭혔다. 프랑스 군대와 싸울 때 발휘되던 게릴라 전술은 힘을 더했다. 호치민의 군대의 정말 무서운 점은 포용력이었다. 이미 거의 모든 베트남 인들을 지지자로 만든 호치민은
미군 측에 붙어 자신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동포마저도 포용했다. 호치민의 해방전선은 자신들의 포로가 된 이들까지 용서하고 설득해 결국엔 남베트남 군이 미군의 등에 총을 쏘게 하는 결과를 이끌어 낸다. 1969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의 시체 때문에 한 뼘의 농지도 낭비할 수 없다며, 화장 시켜 작은 단지 안에 담아달라고 한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영구보존 처리하여 웅장한 묘소에 안장하였다(금번 박근혜 대통령 참배) 1973년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 후 베트남에서 전면 철군한다. 그리고 호치민이 죽은 지 6년 뒤인 1975년, 그가 이끌던 군대는 사이공을 점령하고 괴뢰정부 남베트남을 궤멸시킨다. 이로써 완전한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한다. ![]() 박근혜 대통령이 9일 하노이에 위치한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를 찾아 헌화했다. 박 대통령이 묘소 입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라고 쓴 리본의 끝을 조화에 붙이고 있다. 리본 끝을 조화에 붙이는 것은 베트남의 전통 헌화 예절이다. 조화는 베트남 토종 국화과 식물인 `호아따이방`으로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 역사의 화해' 매듭을 풀면서,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 주석께선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변화하는 것에 대응한다’는 뜻의 ‘지벗비엔 응번비엔(以不變 應萬變)’이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우정과 신뢰가 변치 않는다면 어떤 변화와 도전도 능히 함께 대응해나갈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 박근혜 대통령이 9일 하노이에 위치한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를 찾아 헌화했다. 박 대통령이 묘소 입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라고 쓴 리본의 끝을 조화에 붙이고 있다. 리본 끝을 조화에 붙이는 것은 베트남의 전통 헌화 예절이다. 조화는 베트남 토종 국화과 식물인 `호아따이방`으로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 역사의 화해' 매듭을 풀면서,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 주석께선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변화하는 것에 대응한다’는 뜻의 ‘지벗비엔 응번비엔(以不變 應萬變)’이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우정과 신뢰가 변치 않는다면 어떤 변화와 도전도 능히 함께 대응해나갈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미 거의 모든 베트남 인들을 지지자로 만든 호치민은
미군 측에 붙어 자신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동포마저도 포용했다. 호치민의 해방전선은 자신들의 포로가 된 이들까지 용서하고 설득해 결국엔 남베트남 군이 미군의 등에 총을 쏘게 하는 결과를 이끌어 낸다. 1969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의 시체 때문에 한 뼘의 농지도 낭비할 수 없다며, 화장 시켜 작은 단지 안에 담아달라고 한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영구보존 처리하여 웅장한 묘소에 안장하였다(금번 박근혜 대통령 참배) 1973년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 후 베트남에서 전면 철군한다. 그리고 호치민이 죽은 지 6년 뒤인 1975년, 그가 이끌던 군대는 사이공을 점령하고 괴뢰정부 남베트남을 궤멸시킨다. 이로써 완전한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한다. ![]() 박근혜 대통령이 9일 하노이에 위치한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를 찾아 헌화했다. 박 대통령이 묘소 입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라고 쓴 리본의 끝을 조화에 붙이고 있다. 리본 끝을 조화에 붙이는 것은 베트남의 전통 헌화 예절이다. 조화는 베트남 토종 국화과 식물인 `호아따이방`으로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 역사의 화해' 매듭을 풀면서,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 주석께선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변화하는 것에 대응한다’는 뜻의 ‘지벗비엔 응번비엔(以不變 應萬變)’이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우정과 신뢰가 변치 않는다면 어떤 변화와 도전도 능히 함께 대응해나갈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 박근혜 대통령이 9일 하노이에 위치한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를 찾아 헌화했다. 박 대통령이 묘소 입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라고 쓴 리본의 끝을 조화에 붙이고 있다. 리본 끝을 조화에 붙이는 것은 베트남의 전통 헌화 예절이다. 조화는 베트남 토종 국화과 식물인 `호아따이방`으로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 역사의 화해' 매듭을 풀면서,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 주석께선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변화하는 것에 대응한다’는 뜻의 ‘지벗비엔 응번비엔(以不變 應萬變)’이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우정과 신뢰가 변치 않는다면 어떤 변화와 도전도 능히 함께 대응해나갈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실력을 보인후 공산당의 비밀 요원으로
랑군과 캘커타 등지에서 활약하게 되면서 당시 그는 첩보전과 교란에 발군의 였는데, 귀신 같은 변장과 잠적으로 수없이 많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기록됐다. 1925년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을 위해선 먼저 지식인과
청년들을 대중 속에 보내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베트남 혁명 청년동지회를 결성한다. 그리고 1929년에는 홍콩에서 인도차이나 반도 공산당을 결성, 군대를 모으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베트남 독립 운동의 주도권은 호치민이 지도하는 공산당으로 넘어간다. 1940년 2차 대전이 발발한 뒤 일본군이 베트남으로 진군,
베트남을 지배하던 프랑스 정권을 격퇴한다. 초기 베트남 인들은 일본을 해방군으로 오인했으나, 호치민은 일본 역시 제국주의자들과 한패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베트남 독립전선을 조직, 일본군에 저항한다.
그러나 그의 게릴라 부대는 일본군에 패배를 거듭했다. 이때 호치민은 자신의 공산주의 노선을 변경한다.
지주의 재산을 몰수해 농민에게 분배하는 전형적인 공산 혁명이 아니라, 제국주의자와 매국노의 토지만 몰수해 빈농에게 배분하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베트남의 기득권 및 지주층에게 이대로 식민지배가 계속되면 결국 베트남 인 모두가 공멸할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이때부터 그의 게릴라 전술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1945년 호치민은 패망해 가던 일본군을 베트남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마침내 독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독립의 기쁨도 잠시, 쫓겨났던 프랑스 군대가 질서 유지를 보조한다는 명분 아래 베트남을 재침략 한다. 1946년, 프랑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호치민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 1명이 죽을 때마다 베트남인 10명이 희생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들은 패배할 것이고 우리는 이길 것이다." 말은 현실화 되었다. 프랑스는호치민의 2차 대전에서 맹위를 떨친 비행기, 장갑차, 대포등의 막강 화력을 몰고 왔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프랑스 군은 패색이 짙어 갔다. 호치민의 군대가 이미 거의 모든 민중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호치민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농민들은 게릴라 부대에게 식량을 가져다 주었고, 도시의 시민들은 프랑스 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프랑스 군대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1954년 베트남 군은 총반격을 개시,
디엔 비엔 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궤멸시키고 프랑스는 8년간의 전쟁 끝에 남부 베트남에 괴뢰 정부를 남긴 채 완전 철수 한다. 호치민은 이제 베트남 민중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굳은 결의로 베트남을 독립된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던 미국은 베트남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미국은 1955년 프랑스를 섬기고 있던 베트남의 꼭두각시 황제
바오 다이를 몰아 내고, 고 딘 디엠을 남 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삼아 새로운 남베트남 정권을 세운다. 그러나 딘 디엠의 남베트남 정권은 수많은 실정과 부정을 저질러 끊임없는 민중 봉기와 쿠데타를 겪어야 했고 붕괴 위기에 놓인다. 미국은 남베트남의 위기를 북베트남의 침략과 공작으로 규정,
남베트남의 민주주의와 자결권을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 전을 일으킨다. 미국은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베트남의 통킹만에 주둔하고 있던
미 구축함을 폭파시키고, 베트남 군의 어뢰에 맞아 침몰했다고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 (일명 “통킹만 사건”일본의 만주사변 명분으로 조작한 '노구교사건'과 같음) 호치민의 군대는 소련이 지원한 전쟁 무기와 전국민의 지지 기반으로 미군을 쉴 사이 없이 괴롭혔다. 프랑스 군대와 싸울 때 발휘되던 게릴라 전술은 힘을 더했다. 호치민의 군대의 정말 무서운 점은 포용력이었다. 이미 거의 모든 베트남 인들을 지지자로 만든 호치민은
미군 측에 붙어 자신들에게 총부리를 겨 하위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