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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료

제목 *<동고를 빛낸인물>: 사립4회 윤인구 대선배님.
글쓴이 박명식(44) [ mspark4905@hanmail.net ]
작성일 2012-04-24
파일 1335201186. [ 0K ]   다운수: 77
 부산대 초대총장 尹仁駒 목사




  `나는 하늘로 화살 하나를 쏘았네 그 화살이 어딘가에 떨어졌지만 나는 그곳이 어딘지는 알지 못하네 너무도 빨리 날으는 화살 나의 시선으로 따라갈 수 없었기에 나는 하늘에 노래 한 곡을 날렸네 그 노래가 어딘가에 떨어졌지만 그곳이 어딘지는 알지 못했네 시력이 제아무리 좋다고 하나 날으는 노래를 따라갈 수 있겠는가 아주 먼 훗날 나는 찾았다네 참나무에 부러지지 않은 채 박혀 있는 나의 화살을 한 친구의 가슴속에 처음부터 끝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는 나의 노래도'



   미국시인 롱펠로의 <화살과 노래>는 부산대 초대총장 尹仁駒가 평생 잊지 않고 힘을 얻은 詩다. 자신의 수고 노력이 후진의 가슴에, 그들의 일생에 남아있고 도움이 된다면 교육은 몸바칠만한 것이라고.



  그는 또 한 강의에서 이런 인용을 했다."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의 소학교시절에 그의 교장은 소학생을 대할 때마다 먼저 모자를 벗고 깍듯이 경례를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묻는 이에게 그는 `이 안에 어떤 위대한 인물이 숨어있는지 아느냐'고 답했답니다. 이 교장의 경례가 마르틴 루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겠습니까."돌무더기 땅에서 오늘의 부산大를 일구어낸 尹仁駒의 교육관을 엿보게 하는 말이다. 80평생 교육으로 일관한 그가 물질적으로 남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를 떠나보낸 뒤 부인 方德守씨(91) 홀로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조차 이미 부산大에 헌납된 상태다.



  그러나 <화살과 노래>란 시처럼 그가 뿌린 씨앗은 열매를 맺었다. 지난 15일로 개교 48주년을 맞은 부산大는 8만5천명의 학사 석사 박사 등 지역사회의 인재를 배출하며 뚜렷한 학맥을 형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40년 전 사람도 살지 않고 교통편도 없었던 현 부산大자리에 "미친 사람""꿈꾸는 사람"이란 소리를 들어가며 쌓아 올린 상아탑은 그의 선견지명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청년기엔 부흥목사로서, 장년기엔 농촌과 농민을 위한 계몽자요 교육자로서, 노년에는 사회봉사자로 활동한 윤인구는 1903년11월1일 부산 龜浦에서 태어났다. 부친 윤상은은 일제 때 독립군에 자금지원을 한 금융인이었으며 동래 府尹을 지낸 백부 윤필은, 독립투사였던 종형 윤현진 등서 보듯 그의 집안은 내로라 하는 유지집안이었다.



  부산진보통학교를 졸업, 동래고보에 다니던 중 3.1운동에 가담했던 윤인구는 중도 퇴학 후 서울YMCA청년회학관에 다녔다. 그의 인생항로를 정해준 기독교와의 만남은 일본유학시절.1920년 明治학원 중학부에 입학한 그는 성경과 톨스토이, 사회사업가의 체험록 등에 접하면서 기독교교육에 뜻을 둔 청교도적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명치학원에서 대학과정인 신학부를 졸업한 뒤 미국 프린스턴大,영국 에딘버러대학원을 마친 1931년 윤인구는 평생동지인 동갑 방덕수와 28세란 늦은 나이에 결혼, 진주 玉峯교회에 부임함으로써 종교지도자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부산 초량교회의 이약신, 마산 문창교회의 주기철목사 등과 경남 3대교회의하나를 맡은 젊은 목사 윤인구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4년 간의 목회생활 끝에 교회는 사회 특히 비참한 농촌을 향해 좀더 나아가야 함을 깨닫는다.35년 마산복음농업實修학교로 부임, 농촌교회사역자와 농촌지도자양성을 꾀한 것은 개인적 사역에서 민족인재 기르기로 방향을 전환한 셈이었다.



  해방은 그런 그에게 많은 일감을 안겨줬다. 美軍政하 慶南도 학무과장을 맡은 윤인구는  일본인교사들이 떠나버린 국교 중학교를 다시 열고 교사양성에 온힘을 쏟았다. 뒤에 부산교육대로 발전한 부산사범학교도 이때 설립됐고 이화여전을 나온 부인이 영어교사를 맡기도 했다. 학무에 관여한 5년 간 그가 충원한 교사는 1천5백여 명에 달했다.



  한편 윤인구는 대학설립기성회 5,6개를 통합해 1946년5월15일 부산대학의 설립인가를 받아낸다. 그러나 마땅한 校舍가 없어 수산대, 대신동의 청년학술원 등을 전전해야 했다. 그것마저 軍에 뺏기고 대신동 운동장 뒤 종묘원을 매입, 천막교사를 지었다. 이곳에 다시 유엔 한국지원단 등과 후원회의 도움으로 목조교사를 지었다. 땅값을 다 치렀음에도 불쑥 前지주가 나타나 "내 생업을 망쳤다. 학장인지 고추장인지 나와라"고 고함 치곤해서 교사 뒤에 있던 집에서 잠자지 못하고 피하는 일도 겪었다.



  그런 중에도 더욱 분발하여 53년4월 종합대학 승격을 이뤄낸 윤인구는 이해11월 초대총장에 추대되었다.55년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전동 돌밭계곡에 美軍의 원조로 부지를 마련했다.한 제자의 표현처럼 그는 하느님이 천상을 가꾸듯 부산大를 천상화원으로 가꿨다.



  "집에서 주먹밥을 뭉쳐서 현장에 나오셨죠. 인부들과 함께 국수를 삶아먹으며 군용침대에서 주무셨습니다." 효원교사를 지을 때 함께 일했던 前부산大교수 오점량씨(78)의 얘기다. 오늘날 남아있는 새벽벌 `曉原'이란 이름과 무지개문, 웅비의 기상을 염원한 雄飛의탑과 교기의 독수리상은 그가 창안한 것이니 부산대 구석구석 나라와 민족을 생각한 그의 정신이 스미지 않은 곳이 없었다.



  윤인구와 접했던 사람은 그의 업적에 앞서 독특했던 품성을 떠올린다. 거짓말을 무엇보다 싫어한 대쪽같은 성격에 검소한 생활로 일관한 그에겐 공무로 출장 갔다가 출장비를 아껴 쓰고 돌려준 일화가 항상 따라다닌다. 그러나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기 어려운 것일까. 그에게는 의외로 적이 많았다.



  "한번 신임 얻기가 힘든 분이었던 반면 여러 번 테스트 끝에 `깨끗하다'란 판단이 서면 무한정 사랑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입대했을 땐 논산까지 면회를 왔을 정도였어요. 거꾸로 `이 사람은 거짓되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눈밖에 났으니 너그러움이 부족했다고나 할까요. 속이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으면서도 이런 단순함 때문에 정치술수에 능한 이들에게 이용당해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그의 제자인 동의대 정권섭교수(58.법학)는 그가 정치에 능했으면 포용력도보였을 것이며 부산大를 떠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와는 무관했던 윤인구는 1947년이래 학장서리 학장 총장 등 12년 간을 장기집권한데 대한 거부반응과 교직원들의 갈등, 자유당정권과 연계된 반감으로 총장연임이 거부되면서 60년 부산大를 떠났다. 총장직에의 욕심은 없었으나 이를 둘러싼 파당, 감투싸움에 그는 큰 상처를 받았다.61년 연세大총장에 부임하게 됐지만 그 상처가 아무는데는 그가 부산大에 쏟아 부은 15년 세월만큼이나 긴 세월이 필요했다.



  64년 연세大총장직을 사퇴한 그는 80년 중풍으로 눕기까지 부산大강사 부산신학교교장 영남신학교 설립 등 꾸준한 교육활동을 벌이다 86년1월25일 눈을 감았다.



  윤인구는 청교도적 생활로 모인 2억 원의 재산을 부산大에 후진들의 장학기금으로 희사했다는데 그의 사후 여기에 그의 부인이 살고 있는 아파트와 제자들의 성금이 보태져 91년5월15일 그와 부인의 이름을 한자씩 딴 仁德기념관이 교내에 세워졌다.



  "자신의 동상이 세워질까봐 걱정하셨을 정도로 私慾이 없으셨죠.仁德이라 이름 붙인 것을 좋아하실 분이 아니어서 기념관건립을 승낙한 사모님은 `내가 그이보다 속물인가보다'하고 많이 후회하셨습니다."부산大시절 제자 이정원씨(여.58)의 말이다. 그처럼 맑은 人性을 간직했던 윤인구. 그는 갔어도 육영에 바친 그의 정신은 지금도 숱한 제자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1994. 5. 21 국제신문 / 李英姬기자)







                부산교육 터전 닦은 올곧은 참스승
                부산대 설립으로 지역 인재 육성… 근면 검소한 교육자의 모범


  "당신은 참되고 의롭게 사시다가 이승을 떠났기에 언제나 생활이 청렴결백했고 세속적인 욕심이 전혀 없었다. 한결같은 사랑과 박애의 정신을 가진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린이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고 동화를 즐겨 들려주시기도 했다." - '윤인구 박사 유고집' 가운데 -


  1946년 5월15일 개교한 부산대학교는 영남지방 최고의 상아탑으로 그 동안 10만 여명의 인재들을 배출하여 우리나라의 귀중한 동량이 되게 하였다. 부산대학교는 1955년부터는 금정산 기슭에 자리잡음으로써 훌륭한 학문의 전당이 되었다.


  우리 고장의 대표적 국립대학인 부산대학교를 설립하고 오늘을 있게 한 이가 바로 윤인구(尹仁駒) 박사이다.


  부산대학교 설립에 공헌


  지금도 부산대학교 교정에는 윤인구 박사의 흉상이 서 있다. 그는 일생을 신앙과 교육사업에 온몸을 바쳐 일했고, 만년에 고혈압으로 생을 다하기 전까지 검소 근검한 신앙인과 교육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윤인구 박사는 항상 참되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 신앙인과 교육자의 지표였으며, 자신을 위한 안위의 삶보다는 불우한 사람과 장래성 있는 학생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부산의 인물이다.


  1903년 구포 출생


  윤인구 박사는 1903년 11월1일 경남 동래부 구포(지금의 부산시 북구 구포)에서 아버지 윤상은 씨와 어머니 박영자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구포사립 구명학교 입학 후 부산진공립보통학교 등을 다녔으며, 1919년 동래고보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중도 퇴학하고, 서울에서 YMCA학관에 다니게 된다. 이후 일본 명치학원 신학부, 미국 프린스톤대학 신학대학원, 영국 에딘버러대학 등을 졸업했다.


  그후 진주교회 목사를 거쳐 1941년에는 조선신학교를 개설하고 교장이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부산대학교 창립 안을 세우고 이듬해 1946년 국립부산대학을 개교하고 부산대학교 초대 학장과 총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총장, 부산대학교 강사 등을 지낸 후 1986년 1월 83세의 나이로 별세하게 된다.


  그의 생은 대부분이 신앙과 교육자의 외길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굳이 윤인구 박사의 발자취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꼽으라면 부산대학교의 설립과 발전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 대부분을 투자한 것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부산대학교의 대명사가 된 '효원(曉原)' 역시 윤 박사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부산대학교의 설립과 관련한 수많은 일화들 역시 학교에 대한 그의 사랑과 헌신을 보여준다.


  신앙과 교육자의 외길


  1954년 8월 중순, 한여름의 염천을 마다하지 않고 부산대 윤인구 총장은 금정산 새 캠퍼스의 교사(校舍) 배치 평면도를 작성하기 위하여 현지 답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무성한 초목을 헤치면서 뜨거운 바위를 밟고 다니던 중 문득 뇌리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여기가 바로 새벽벌, 즉 효원(曉原)이다." 윤 총장은 같은 금정산 줄기에 있는 범어사의 원효암은 일찍이 신라의 원효(元曉)대사가 수도한 곳이니, '효원은 원효의 벌 <原>이라는 의미와도 상통한다'고 생각했다.
  즉 효원이라는 이름과 부합된다는 것을 실감함으로써 결국 부산대학교 캠퍼스를 '효원(曉原)'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윤인구 박사는 항상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사명을 따라 참되게 사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그래서 부산대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그 터를 닦을 때에도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였다.


  한여름에도 땀을 흘리며 인부들과 함께 주먹밥을 먹으면서 현장에 기거하며 학교 업무를 직접 챙겼으며, 지쳐 쓰러지면 원기가 회복되는 대로 다시 학교의 터전을 마련하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외국을 시찰하고 돌아올 때도 신기한 나무를 가져와 학교 교정에 심는 등 부산대학교 교정 곳곳에는 윤 박사의 손길과 정성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출장비 자진 반납·고학생 뒷바라지에 한평생


  부산대학교 장전동 캠퍼스 조성 당시에도 허허벌판에 너무 큰 규모로 학교를 짓는다는 말들이 많았지만 정작 윤 박사 자신은 더 크고 넓은 100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좁은 식견과 싸워야 했다고 한다.


  윤 박사에 대한 또 다른 일화 역시 그의 참된 교육자적 정열과 신념을 잘 보여준다.
  6·25 당시 대학생들에 대한 징집이 성해 대학의 자리가 많이 비게 되었을 때 갖은 고초 속에서도 윤 박사는 낙망하거나 포기하기는 커녕 도리어 "이제는 군목(軍牧)이 되어 군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쳐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특히 사심 없는 윤 박사의 양식은 고학생들에게 학비를 감면해 주거나 장학금을 지급해 그들이 어려움을 딛고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준 것으로 유명하다.


  공무로 인해 출장을 다녀왔을 때는 남은 여비를 담당 직원에게 반드시 돌려주는 등 올곧은 그의 성품은 신앙인과 교육자로서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평생 모은 서적 대학 기증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과 실천 역시 우리들의 가슴에 깊게 와 닿는다.
  "재산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서적이 조금 있다. 이것은 모두 전문서적이고 대부분 양서(洋書)인데 앞으로 대학에 기부하려 한다. 일반 대학보다 책들이 필요한 곳에 기부할 생각이다."


  실제로 책은 윤 박사 사후 부산대학교와 영남신학교에 기증되었다. 부산대학교 설립에 공헌한 것을 들지 않더라도 윤인구 박사의 삶은 우리 부산을 빛낸 인물로 전혀 손색이 없다. 사람들과 사귐에 있어서는 자신에 대해 변명하거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 남이 자신을 해롭게 하거나 불쾌할지라도 그들과 다투거나 나쁘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는 윤인구 박사.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를 통해 21세기 부산의 미래를 책임질 교육의 터전을 얻었고, 참되고 바른 삶의 지표와 참스승의 교훈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이야기' 조민제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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