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구름 위의 도시 필리핀 바기오. 그곳에서 인생의 황혼을 만끽하는 부부가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정원영(61)·김순옥(60) 부부.


매일 아침 가벼운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정씨 부부가 손을 잡고 집 근처를 한바퀴 돌고 오면 가사 도우미 샤메가 친절한 미소를 띠고 따뜻한 아침밥을 준비한다.


이들 부부는 아침을 여유롭게 먹고 나면 전용 운전수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골프장으로 향한다. 골프를 치고나면 온천에 들러 하루의 피로를 말끔이 씻어낸다. 여유로운 생활 탓인지, 아름다운 자연경관 때문인지 정씨 부부의 마음은 한국에서와 달리 한결 느긋해졌다.






55세에 정년 퇴임할 당시 정씨는 자식들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월수입이라곤 매달 나오는 연금 200만원이 전부였다. 더 이상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는 나이인데다 재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수십여 곳에 제출했지만 오라는 곳은 없었다.


결국 정씨는 연금을 쪼개 쓰며 남은 여생을 보다 안락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정씨에게 눈에 띈 곳은 필리핀의 바기오. 이곳은 한국의 가을 같은 날씨에 3층짜리 호화 별장을 월 40만원의 임대료로 빌릴 수 있을 정도였다.


정씨는 2년간의 준비 끝에 해외 은퇴이민을 감행했다.


이곳은 580만원(골프 평생회원권)이면 평생 부부가 골프를 치고, 14만원이면 운전수를, 4만원이면 가사 도우미까지 고용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꿈도 꿀 수 없는 매력적인 곳이었다.정씨 부부는 이곳을 주저없이 ‘낙원’이라고 부른다.


해외라면 가장 먼저 고민하게 되는 것이 의사 소통 문제. 그러나 정씨 부부는 영어 단어 50개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맞지 않는 문법에 한국 토종 영어 발음이지만 의사소통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이 이들 부부의 얘기다. 실제로 부부가 사용하는 영어는 중학교 수준이다.


그러나 언어의 가장 큰 장벽은 두려움이라고 믿는 부부는 무조건 누구에게나 말을 건넨다. 그것이 정씨 부부가 새로운 나라에 적응하는 그만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정씨 부부는 서툰 영어 실력으로 필리핀의 캐디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필리핀 문화를 배우고 현지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따갈로그어까지 배우고 있다.


사람의 인생을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는 정씨. ‘제 1의 인생’은 부모 밑에서 자라는 시기이고, ‘제 2의 인생’은 자신이 부모가 되어 자식들을 키워내는 시기다. ‘제 1의 인생’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 문제지만,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자신만의 인생을 사는 ‘제 3의 인생’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정씨 부부는 ‘제 3의 인생’을 필리핀 바기오에서 시작하고 있다. 남은 인생을 필리핀 바기오에서 보낼 생각인 정씨는 ‘필리핀’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필리핀의 역사, 지리에서 문화 풍습까지. 자신을 ‘필리핀 베이비’로 칭하는 정씨의 내일은 흥미진진하기만 하다.


부부는 오늘도 함께 정원을 가꾸며 한가로운 오후를 보냈다. 황혼의 아내는 화분을 손질한 후 코스모스를 심고, 남편은 개집을 완성했다. 필리핀에서 부부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 간다.


정씨 부부의 성공적인 동남아 ‘은퇴이민기’는 ‘굿모닝 필리핀’이라는 제목으로 KBS 2TV ‘인간극장’을 통해 16일부터 20일까지 방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