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 정헌택 
| 제목 | ★★★ 백승수 제4시조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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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박상남(46) [ sangnam3000@hanmail.net ] |
| 작성일 | 2021-11-11 |
소인이 글에 대해 대단히 약해 daum blog의 글을 대신하여 올립니다.
□ 발문跋文
시조의 비유比喩와 초자연적 주술이 이루어낸 서정 미학의 완성
권 혁 모(시조시인)
1. 백승수 시인의 삶과 시조의 아이덴티티
백승수 시인은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화려하게 등단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 이전에 <시조문학> 추천을 통하여 문단에 나왔다.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에 겨우 네 번째의 시조집 『윤슬에 대하여』를 상재하게 되었으니, 이는 자신의 작품에 자만심 보다는 지나친 조심성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작품 앞에서는 매우 겸손한 태도로 “난 참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이다”라고 자책하기도 한다.
시조 형식과 율격에 대해서는 “그것은 마치 칠면조 같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히드라」 같고, 자꾸 몸 색깔이 변하는 카멜레온 같은 것”이라며, 시조의 정체성에 대한 소회를 시인의 자서自序에서 밝히고 있다.
필자는 백 시인과 같은 해에 문단에 나왔으며 그동안 작품을 통하여 조우하고 있던 사이였다. 그런데 부산과 안동에서 각각 정년퇴임 후 서울로 이사 와 같은 동네에서 살며, 같은 문학단체에서 활동하는 관계가 된 것이다.
이따금 외가 집안이라며 ‘외사촌’이라 하니, 이보다 더 반가운 인연이 또 어디 있을까? 한동안 가까이에서 그와 동행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 행운이자 축복인 셈이다.
그를 만나는 날은 언제나 웃음꽃이 만발한다. 문인끼리의 좌중에는 언제나 그가 주인공이었고 눈물 나도록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아내가 금괴를 던져 이마에 맞았다”라는 부자 자랑(?) 등, 그의 가정사에 과장을 더하여 코믹하게 듣는 자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또한 문학박사의 학문적 업적이 이루어 낸 해박한 식견과 소탈한 성품이 친근감을 주는가 하면, 그가 만나는 가까운 사람들은 누님이고 형님이며 아우였으니, 이보다 더 질박한 삶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그의 시조에서 읽을 수 있는 건강한 보법으로 미루어 생활 속 어느 한 부분도 시조 아닌 것이 없는 듯하다.
이런 삶이 은은히 배인 시조가 이번에 출간하는 『윤슬에 대하여』에서 온전히 보인다. 여든 편 대부분이 겸손하고 따뜻한 삶의 성찰이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시편들로 읽는 이의 가슴을 출렁이게 한다.
그런가 하면 삶의 자리마다 그림자처럼 따르는 뒷이야기를 멋스럽게 엮어낸 풍자 같은 것, 지난 세월에 대한 애틋한 향수, 그리고 그가 만나는 자연 현상에 대한 심오한 사유思惟가, 마치 장강長江이 굽이쳐 흐르듯 시조의 중원中原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이만치 그의 시적 충동은 도도함이며 탄탄한 서정의 발원지이다. 단수 정형시조의 디올라마diorama이기보다는, 연시조가 성취하고자 하는 파노라마적panorama인 장쾌함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그의 시작詩作에 대한 역량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시조의 가독성可讀性 측면에서, 길어도 길지 않는 각 수의 ‘자연스러운 펼침’gradation이 그의 시조의 정체성idendity이기도 하다.
2. 겸손하고 따뜻한 삶의 성찰
한갓 티끌에도 그림자가 묻어나듯
발가락 구석 새에 뿌리같이 배인 티눈
산 너머 뻐꾸기 소리로 가만가만 앉은 티눈
빨간 상처 가운데로 원추 같은 돌기 있어
붓고 탱탱하게 자리 잡은 그것들은
돌아온 봄바람 속에 숙과熟果같이 익어간다
삶은 절로 티눈 같아 만져가며 달래가며
모르는 척 그냥저냥 후회하며 치료하고
이 하루 깔창에 깔듯 견뎌내는 것 아닐까
- 「티눈에 대하여」 전문
발에 돋은 티눈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 편치 않았던 마음을 시인은 삶의 과정에 비유하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티눈은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가 아니라 동행해야 할 숙명 같은 것으로 여기며 진정시키려 하고 있다.
작품 들머리는, “티끌에도 그림자가 묻어난다”는 원초적인 그림자의 속성을 가설로 제시하여 티끌에 대한 탈 관념화를 시도하고 있다.
“산 너머 뻐꾸기 소리로 가만가만 앉은 티눈”이 있어 그의 발가락 사이에서 “돌아온 봄바람 속에 숙과熟果같이 익어간다”라고 한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피치 못할 아픔이 화자의 삶 전 과정에 오버랩 시켜 외연外延을 확장하고 있다.
첫째, 둘째 수가 티눈의 속성으로 제한되었다면 셋째 수는 ‘티눈=삶’을 두고 삶에 대한 명제를 풀어가고 있다. “삶은 절로 티눈 같아”라는 인因과 “만져가며 달래가며”, “모르는 척 그냥저냥 후회하며 치료하고”라는 과果를 대구법antithesis으로 설정한 관계 미학, 여기서 얻는 반전이 놀랍다. 이렇듯 편하지 못한 하루를 “깔창에 깔듯 견뎌내는” 반전이 예사이지 않다.
여기서 밑줄 부분의 종장에서 압권을 이룬 비유가 백 시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빛날 수 있었음은, 자칫 시조에서 놓치기 쉬운 긴장감이 실사實辭의 형태소를 이룬 음보音譜와 완벽한 구句의 놓임으로 맺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떨궈진 소맷자락 단추 하나 달아내다
아차하는 짧은 순간 손가락 끝 헛 찔렀다
적막이 가을 달처럼 동그마니 뜨는 밤에.
핏물이 송송 배인 후회 같은 그 말씀들
아픔으로 되돌아와 바늘귀에 들어앉고
뚫어진 단추 구멍처럼 실로 찬찬 꿰어진다.
어려운 약속 같은 단추는 꼭 달아야지
세월에 주름져서 흠이진 채 모난 것도
미욱한 손가락 사이에 묻고 또 파묻으며.
귀동냥에 들어왔던 모양새를 갖추었기
엇잠근 단추구멍을 고쳐 끼는 밤이 와도
내 생애 꽃 한 송이는 그 안에서 잠을 잔다.
- 「단추 달기」 전문
백 시인의 작품 대부분이 그러하지만, 연시조에서 흔히 네 수 한 편은 한시의 기승전결起承轉結 구조를 따를 가능성이 높다. 「단추 달기」도 그렇다. “손가락이 찔리고 적막이 가을 달로 뜨는 것”으로 상想을 일으키며, “후회 같은 말씀들이 바늘귀에 들어앉는”다는 이야기의 펼침과 “흠이 진 채 모난 것도 묻고 또 파묻는다”라는 관념의 전환, 그래서 생애의 꽃 한 송이는 그 단추 구멍 안에서 잠잔다며 자신의 삶의 과정을 일반화하기에 이른다.
시조의 품격은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배제되어야 한다는 압축성이 우선이라고 한다면, 네 수의 「단추 달기」는 어느 한 수首와 장章과 구句에서도 더하고 빼어야 할 부분이 없이 완결되었다. ‘일어설一語說’이야말로 왜 시조여야 하는가에 대한 입증이다.
그리고 “적막이 가을 달처럼 동그마니 뜨는 밤에”라든지, “아픔으로 되돌아와 바늘귀에 들어앉고”, “내 생애 꽃 한 송이는 그 안에서 잠을 잔다”는 마법에 가까운 행간이 시조의 서정성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영취산 산허리에 진달래꽃 피는 날은
햇살 분분하게 흩날리는 자취 따라
삼짓날 푸른 봄빛이 소沼를 이뤄 앉습니다.
내 안의 시름일랑 떡가루로 뭉쳐놓고
꽃이며 풋 남새로 화전 빚어 구워낼 때
인정도 하늘 편 편에 산새들로 나릅니다.
우리네 고된 삶도 전煎과 같은 것이라서
꽃 속에 박힌 말씀 꿀을 발라 재어두고
한 세월 사는 이치나 내가 곰곰 새깁니다.
꽃은 비록 아담해도 왕족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침묵들이 송이송이 맺혔기에
소순蔬荀의 작은 슬기를 여기에서 배웁니다.
- 「화전놀이」 전문
화전놀이는 봄날 야산 등지에서 진달래꽃을 부치거나 떡에 넣어 먹는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이자 세시풍속이다. 물질적 풍요를 강요하는 각박한 현실과는 대비되는 화전놀이의 시대, 그때의 행복지수는 지금보다는 몇 배 더 높았을 것이다.
흑백 영상의 시대, “푸른 봄빛이 소沼를 이뤄 앉아 있는” 영취산 산허리에서 “시름일랑 떡가루로 뭉쳐놓고” 화전 빚어 구워내는 ‘느림의 미학’을 첫째, 둘째 수에서 한 폭 수채화를 그렸다.
셋째 수는 전환이다. 바로 이런 전煎과 같은 것이 우리네 삶이라 한다면, 그 화전의 재료인 꽃에 담긴 말씀을 곱게 받아들이며, 삶의 이치를 반추해 본다는 다짐이다.
넷째 수에서는 화전놀이를 하였던 꽃의 의미를 확장하였다. 북송 때의 시인 소순의 슬기를 배운다고 하였으니, 화자에게는 예사의 꽃과 화전놀이가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다. 소순은 과거에 여러 번 낙제하자 지은 글을 모두 불태우고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전념했고, 그 결과 당대 대문장가가 되었지 않았던가?
「화전놀이」는 ‘영취산의 봄 풍경’ → ‘화전놀이의 무대’ → ‘삶의 의미’ → ‘작은 가르침‘ 등이 귀납적인 관계로 이어지는 가운데, 어쩌면 오늘의 현실과는 거리감이 있다 하여도, 그 시대를 공유하였던 화자의 추억을 핑크빛 진달래 언덕으로 달려가게 하는 서정이 돋보인다.
3.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바라보기
그런 것이 있다는 건 참으로 기적이야
어렴풋이 나약하게 무심으로 반짝이며
작고 또 작은 것들을 그림처럼 그려내지.
바닷가에 달 비치어 이뤄내는 물무늬에
윤슬이란 이름 붙여 쓸쓸함이 더해지면
깨져도 다시 살아나 일렁이는 바로 그것.
때론 잔잔하게 또 어떤 땐 우아하게
비늘같이 아른아른 반짝이는 춤사위는
결국은 자신을 위한 불꽃놀이 같은 거지.
그럴 땐 높고 낮은 별의 노래 들려오고
그 노래 어딘가에 사는 일이 아픈 이 밤
그것들 뭉치고 흩어지며 또 하나의 꽃이 되지.
- 「윤슬에 대하여」 전문
어느 봄날 안양천에서 가까운 시인끼리 모여 시낭송회를 하고 있었다. 그때 안양천의 물빛이 작은 다리 아래에 비쳐 아름다운 무늬로 일렁이는 모습을 보며, “권 선생님 ‘윤슬’이 참 아름다운 우리말이지지요” 하였던 때가 있었다. 윤슬은 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일컫는 말이다.
그 작은 반짝임을 노래한 「윤슬에 대하여」는 시인이 아니고는 이렇듯 질펀한 서정으로 엮어갈 수 있을까?
“어렴풋이 나약하게 무심으로 반짝이는” 그것, “작고 작은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시인의 시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바닷가에 달 비치어 이뤄내는” 쓸쓸한 윤슬, 그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불꽃놀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를 소망하는 기도일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별의 노래 속에” “또 하나의 꽃이 되자”는 담담한 시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이야” 라든가, “~지“라는 구어체口語體의 종결어미는 문어체文語體에 비하여 한결 다감한 시적 분위기를 위함일 것이다.
꿈이래야 작고 작게 피어나는 꽃 한 송이
오뉴월 햇살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
뜨거운 연둣빛 성채, 그 성채가 타고 있다.
작아도 아름다운 가난을 다 접고서
줄기마다 방울방울 물방울이 올라가고
가늘게 뜨는 눈빛에 먼 산야도 다가온다.
길어내고 길어내도 다시 솟는 우물처럼
까맣게 익은 꽃씨 소매 끝에 받아 두며
내일의 푸른 기약을 일기장日記帳에 기록한다.
- 「채송화 일기」 전문
필자의 유년 시절의 초가집 화단 맨 앞줄에는 채송화를 심었다. 자주색을 비롯하여 분홍색, 흰색 그리고 노란색의 손톱만한 꽃이 앙증맞고 귀엽게 피었다.
백 시인의 「채송화 일기」가 그런 추억을 소환하고 있다. 작은 꽃 한 송이에 “오뉴월 햇살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라는 ‘새롭게 보기’가 상상력의 극치를 이룬다. 햇살이 작은 꽃잎에 그것도 떼 지어 몰려온다는 것은, 분명 하늘이 내린 축복이자 “연둣빛 성체”가 아닐까?
그러기에 채송화는 “작은 꿈”이며 “아름다운 가난”이지만, “줄기마다 물방울이 올라가고” 그리고 “가늘게 뜨는 눈빛에 먼 산야도 다가오는” 천지 창조의 신비를 축소miniature하여 지금 막 시작이라도 하는 듯하다.
셋째 수는 자연의 연속성을 위한 끝없는 축복이다. 생명을 이을 꽃씨를 소중히 간직하려는 각오와 함께 다가올 미래의 약속을 미리 일기장에 남기려는 채송화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는 듯하다.
시에서 어떤 사물을 대할 때, 작은 것을 크게 보기zoom in와 큰 것을 작게 보기zoom out 사이를 오가며, 이를 시인의 ‘마음눈’으로 제어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특권이 아닐까? 그 연장선에 백 시인의 채송화가 “내일의 푸른 기약”을 일기장에 남겨 두고 있다.
“알곡 하나에 세계가 들어 있고, 반 되들이 냄비 안에서 산천이 끓는다一粒栗中藏世界 半升鐺內煮山川 ”는 시가 「채송화 일기」에도 겹쳐진다.
오래된 집터에서 돌을 하나 주웠는데
휘어진 생김새로 무늬마저 둥그렇다
푸르른 신라적 하늘 곡옥曲玉같이 생긴 돌.
보옥은 아니라도 감아 내린 빛깔이며
점점이 검은 자국, 가로세로 박힌 것이
민무늬 옥을 빚다가 놓쳐버린 돌 같다.
아득한 그 옛날에 나를 닮은 어떤 이가
지은 죄를 빌어가며 갈아내던 돌 같아서
어딘가 남겼을 만한 손때 곰곰 찾는다.
- 「돌」 전문
‘돌’이라니? 산천에 지천으로 널려 있지만, 세상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그런 돌 하나를 주웠는데 “푸르른 신라적 하늘 곡옥曲玉같이 생긴 돌”이라 하였다. 그렇지만 그건 보옥寶玉이 아니라 옥을 빚다 놓쳐버린 돌이라니, 이건 또 무슨 변덕인가?
필시 이 돌은 옛날에 어버이께서 ‘나’라는 못난 자식을 낳은 죄를 빌어가며 갈아냈던 돌이었기에, 어딘가에 남겼을 어버이의 손때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수 ‘환상의 돌’과 둘째 수의 ‘실망의 돌’, 그리고 셋째 수 ‘그리움의 돌’까지 이어지는 그 돌의 본성은 바로 화자을 암시하게 된다. 즉, 화자의 탄생 과정을 ‘돌’이라는 객관적 상관물로 두고 성찰하는 서정敍情이 압권을 이룬다.
그리하여 부질없는 돌의 속살에 감정과 인격을 이입하고도 모자라 화자가 직접 그 돌로 변신하게 되는 아포리즘aphorism이 울림으로 다가온다.
4. 해학과 풍자를 읽는 재미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깨비는 생존한다.
산모롱이 돌아들며 스님 한 분 만나서는 동반하는 옻칠한 듯 검은 개를 보아가며 스님, 스님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냐니까 전혀 딴판으로 얼굴 재며 말하시길, 옛날엔 개야말로 불성이 없었지만 요즘 개는 눈치 깊어 불성이 있다면서 여름밤 공동묘지 떼를 짓고 몰려나와 훠이 물렀거라 난장판을 이루거나 무등타기 숨바꼭질 팔매질 패쌈 중에 활활 불꽃 튀는 쥐불놀이 물론이고, 도리깨질 하는 놈에 사물놀이 하는 놈에 서로서로 빰 때리며 욕지거리 하는 놈에 김가네 논마지기 내 것 만든 이야기며 애먼 사람 잡아내어 태질하던 이야기가 요즘 세상 풍파 속에 짝패마냥 닮았기에 아무리 개라지만 그걸 어찌 모르냐며 그게 도깨비고 아 그놈의 감투싸움, 어제 오늘 일 아닌 걸 개가 다 안다 하니 세상사 개에 맡겨 심판함이 어떠리까.
그래서 개가 성불하여 극락왕생 한단다.
- 「도깨비 타령」 전문
시조집 『윤슬에 대하여』에는 사설시조가 다수 보인다. 이는 조선 중기 이후에 양반 중심의 문학이었던 정형 시조에 비하여 자유로운 내용과 형식을 담을 수 있어서 서민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것은 매우 일상적인 소재이거나 해학과 풍자를 통하여 민초들의 애환을 달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깨비 타령」은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 세상을 조롱하는 듯하다. 개를 몰고 가는 스님에게 개의 불성 여부를 물었는데, 동문서답으로 도깨비 같은 인간 세상의 여러 장면을 설명하면서 그런 도깨비의 행태를 개가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개가 인간 세상을 심판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종장에서의 반전은 “개가 성불하여 극락왕생” 하는 것으로 개의 불성 여부를 결론 내리게 하는 것이다.
「도깨비 타령」은 재미있는 사설시조이다. 이런 짜릿한, 혹은 속 시원한 풍자는 정형의 단수 시조로서는 접근이 어려울 수 있다.
‘도깨비’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지닌 상상 속의 동물이다. 무섭기도 하지만 어리석고 인간의 잔꾀에 잘 넘어가는 순진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불성을 지닌 개의 노래, ‘도깨비 타령’이 들려오는 듯하다.
곰곰한 시련 한 폭 헤아리게 하는 동전
사노라 잊어버린 옛날 친구 비슷하고
이제는 내버린 추억, 반달 닮은 모양새다.
얼비친 가을 하늘 동그랗게 감아쥐고
인간사 오욕칠정을 사려 담은 동전들이
그래도 저희끼리는 말하듯이 반짝인다.
무거운 세월 굴레 탈을 벗고 나앉듯이
모질게 겪은 풍파 제각각 다 다르기에
그런 걸 되짚는 밤엔 잠도 잘 아니온다.
평생 사람 일도 한 그릇에 담아내듯
십 원짜리 동전들이 머리맡에 쌓여있다
남루한 삶의 곡절이 그 속에 다 담겨있다.
- 「동전銅錢에 대하여」 전문
백 시인의 「동전銅錢에 대하여」를 읽으면 세상살이 전부가 보이는 듯하다. 첫째 수는 동전에 대한 속성이다. 시련을 헤아리게 하고, 잊어버린 옛날 친구 비슷하기도 하고, 그래서 내버린 추억이자 반달 닮은 모양새라 하였다.
둘째 수는 동전의 의인화擬人化로 삶의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그 동전이 오욕칠정을 사려 담아 반짝임으로 말하도록 주문하고 있다.
셋째 수는 동전의 정체가 바로 화자 자신이었음을 감지하게 된다. 살아온 날들을 “탈을 벗고 나앉듯이”, “모질게 겪은 풍파 제각각 다 다르기에” 그런 것들을 반추하며 잠을 설쳐야 하는가 보다.
넷째 수는 동전에 깃든 질곡의 삶을 확인하게 한다. “십 원짜리 동전”은 분명 재화임에도 불구하고 ‘욕’이라는 배경을 깔고 있음은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그런 욕이라도 머리맡에 쌓아 두고픈 사람들의 기도가 그 동전 속에 담겨 있음을 확인하게 해 주고 있다.
우리에겐 영혼 어린 빨간 사람 하나 있어
벌거벗은 작은 몸이 들락날락 거린다면
아무리 이야기라지만 그 말을 넌 믿겠니.
호두 그 알갱이는 오돌도돌 하긴 하지
손으로 만져보면 푸른 물이 묻어나며
부딪혀 닳는 소리가 왜각대각 소리 나.
나에겐 나 이외에 또 하나의 내가 있어
팥고물 그 숨소리로 가지런히 누울 때는
우리네 살림살이도 적인赤人으로 놓여 와.
쪼개진 반달 같이 사는 것이 억울하면
잃은 것 얻어 낸 것 반반으로 늘어놓고
갓 구운 호두과자나 제맛으로 먹어봐.
살아가는 온갖 소음 다 비우면 꽃도 되지
나와 내가 닳고 깎여 동그란 꿈 어우러진
눈물이 눈물에 젖은 빵과 같은 과자야.
- 「호두과자」 전문
「호두과자」를 읽으면 척척 들어맞는 시조의 운율과 향기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제목이자 소재인 ‘호두과자’가 그렇고, 이야기의 전개가 정감 어린 구어체인 점, 일상어를 통한 풍유allegory는 발견할 수 있되, ‘복선’이라는 암시를 통한 다의적多義的 의미 접근 등이 독자에게 재미를 더하게 한다.
시조에서 다섯 수 연작은 창작자와 독자에게 부담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호두과자」는 지친 삶의 과정에서 갓 구운 호두과자를 선물하는 듯하여 이런 우려를 해소하고 있다.
첫째 수는 독자를 유혹(?)하는 것으로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영혼 어린 빨간 사람”과 “벌거벗은 작은 몸”이 암시하는 궁금증이 서두부터 흥미를 끌게 한다.
둘째 수는 촉감과 시각 그리고 청각을 통한 스무고개 식의 단서이더니, 셋째 수에 이르러 그 호두과자에 대한 정체성을 부연하며 우리네 살림살이를 떠올리게 한다. “나에게 또 하나의 내가 있다”는 것, “팥고물 숨소리로 가지런히 누울 수 있다는 것” … 여기에서 부부 사이임을 눈치챌 수 있지만, 아직도 원관념을 열어 두고 있다.
넷째 수가 시사하는 이미지는 ‘바로 그런 것 아니냐, 잃은 것도 얻은 것도 결국은 반반이지 않니?’ 하며 숙명적인 삶의 과정을 위무慰撫하고 있다.
마지막 수는 검증이 끝난 호두과자에 대한 일반화이다. ‘비움’을 통한 또 다른 환희의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인생은 호두과자처럼 동그란 꿈으로 익어간다는 소회를 진솔하게 들려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눈물이 눈물에 젖은”이라는 인생의 대반전은, 결국 이쪽과 저쪽을 겸비한 양면성이라는(빵=과자) 달콤한 그 맛 아니겠는가 하고 반문하고 있다.
여기서 “눈물이 눈물에 젖은”의 눈물을 ‘슬픔=①’, ‘기쁨=②’로 표시할 때, 이들 사이의 관계는‘①이 ②에 젖은’, ‘①이 ①에 젖은’, ‘②가 ②에 젖은’, ‘②가 ①에 젖은’ 등으로 의미가 확장되어 사유思惟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시조 한 편에서의 호흡과 서정적 메시지가 시적 역량이라고 한다면, 시조의 「호두과자」를 만든 명장 백승수 시인의 풍미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백 시인의 재기才氣는 삶의 과정 도처에서 감지되지만, 그의 작품 또한 품과 격을 갖춘 텍스트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5. 그리움을 건너뛰기
어릴 적 떠난 누나 옷고름 여민 맵시
풀잎 끝 묻어나는 은가루로 비늘 돋는
추청秋晴을 환하게 여는 너는 하나 등불이다.
잎 돋아 꽃이 피고 꽃은 열매 맺기까지
접고 또 접은 자취 쌍창雙窓같이 빛이 들어
내밀한 안쪽으로만 말씀들이 익어간다.
청산은 또 녹수를 돌아 푸름을 내비치며
아득한 소리결이 허공으로 흩어놓고
부풀은 주황빛 망울 지금 막 문을 연다.
- 「꽈리」 전문
사람이 살면서 그리움보다 더 소중한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사랑스러움은 한쪽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리움은 애증을 함께한 양쪽의 이야기이다.
시인이 바라본 풀꽃 ‘꽈리’가 “어릴 적 떠난 누나”의 모습으로 치환되어 그리움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맑게 갠 가을 날씨를 환하게 여는 ‘등불’이라 하였다.
이는 물리적 자연 현상에 대한 역설이다. 맑은 가을 하늘이 있기에 꽈리가 보이는 것이 자연의 원리이지만, 반대로 ‘꽈리’라는 추상의 등불로 하여 추청秋晴을 연다는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를 통하여 보다 새로운 관념화를 시도하고 있다.
둘째 수 초장의 점층 관계는 정감과 함께 시적 긴장감을 더하게 한다. 시간의 귀납적 흐름은 즐거운 상상력을 불러오게 한다. 초장의 ‘잎→꽃→열매’로 이어지는 인과因果로 하여, 중장의 꽈리 모습을 “접고 또 접은 자취 쌍창雙窓같이 빛이 들어”라며 묘사적 이미지로 변환하였는가 하면, 쌍창 안의 꽈리가 까맣게 익어가는 과정을 “말씀들이 익어간다”라는 상징적 이미지로 재전환reconversion 시켰다.
셋째 수에서 초·중장이 그리움의 배경이라면, 종장에서는 그리움의 절정이다. 그래서 “부풀은 주황빛 망울”이었고, 소리쳐 부르기 위해 문을 열어야 하는가 보다. 그 문은 마치 줄탁啐啄의 섭리처럼 안과 밖을 해체한 뫼비우스의 띠로 그리움을 만나보게 하는 것이다.
귀신도 탐내면서 엿본다는 그 명자꽃
운명 그 자체를 말로 어찌 이를까만 초등학교 동창 중에 명자가 있었는데, 젊은 시절 다 보내고 노인으로 만났을 때, 만약에 젊었을 때 혼인하자 했더라면 내가 그랬겠나 진지하게 물어오기, 아무렴 그랬겠지 웃으면서 답했더니, 아 그게 그 친구의 유언이 되었다고, 산당화 열매같이 신맛 나고 얼룩지고, 꽃은 송이 맺혀 등불같이 피어나는, 명자꽃 그걸 닮은 그 친구를 추억하면, 알 수 없이 뭉클하는 그것 또한 심상찮아, 낫질하다 손 다친 듯 쓰라림이 무던하다
참말로 사람 사는 일, 왜 이다지 느껴운가.
- 「명자꽃 이야기」 전문
명자꽃은 봄꽃 중 가장 붉은 꽃임에도 그 모습이 화려하지 않고 청순해 보인다. 쉽게 시들지 않으며 참하게 생긴 것이 볼수록 예쁘다. 얼마나 그러했으면 “귀신도 탐내면서 엿본다는 그 명자꽃”이라 하였을까.
「명자꽃 이야기」는 중장이 길어진 사설이다. 당시에는 일본식으로 흔했을 ‘명자’라는 이름의 여자 친구, 60년을 돌아온 노년끼리의 만남은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만약에 젊었을 때 혼인하자 했더라면 내가 그랬겠나”라고 묻는 여자 친구의 순정, 능청스럽게도 “아무렴 그랬겠지”라는 남자 친구의 무심한 답, 이런 것이 바로 짝사랑이라는 관계일까?
지금은 유언으로만 가슴속에 남아있는 ‘명자’라는 옛 친구를 명자꽃에 병치 시켜 두고, 이제는 관객의 입장이 되어 지난날을 위무하고 있다. “산당화 열매같이 신맛 나고 얼룩지고, 꽃은 송이 맺혀 등불같이 피어나는, 명자꽃 그걸 닮은 그 친구를 추억하는”이야기가 코끝을 찡하게 하고 있다.
수몰 마을에서 수몰된 나 찾습니다
너 이담에 장가들면 같이는 살지 말자
어머니 눈물 거두시며 이르시던 그 말씀을.
죄에 가려버린 옛 마을 정취 속에
벌레 울음 소리나고 가을바람 불어오며
동그란 까치집 닮은 환상들만 있습니다.
방황하며 살아가다 이제 겨우 돌아와선
물빛 하늘빛이 하나 됨을 보아내며
주름진 낮달 그림자에 종이배나 띄웁니다.
소년은 간 데 없고 백발 섞인 늙은이가
물속에 잠긴 말씀 이명耳鳴으로 듣는 밤엔
피 맺힌 삭풍 회한이 물레처럼 감깁니다.
- 「수몰 마을에서」 전문
「수몰 마을에서」는 수몰이라는 가시적인 배경과 또 다른 추상적 이미지를 병치 시켜 화자가 찾고 있는 그리움의 모천母川으로 달려가고 있다. 어렸을 적 어머니의 가슴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겼으면 “너 이담에 장가들면 같이는 살지 말자”고 했을까? 물론 시적 표현 그대로의 모습은 아닐 수도 있다.
그 말씀은 어머니가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식으로서의 효를 다하지 못한 그리움의 역설일 수 있다. 시적 진실성의 여부는 언어의 일차적 표현이 아니라, 그 배경에 숨겨진 사유의 진실성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수는 수몰 마을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물=죄’로 치환된 관계가 재미있는 상상을 불러오게 한다. “동그란 까치집 닮은 환상”은 꿈이었을까? 그런 꿈을 위한 인생길을 다 돌아와 물빛과 하늘빛이 하나로 만나는 원리를 수긍하고 있다. “낮달 그림자에 종이배를 띄워보는” 화자의 모습이 잔잔한 애상哀想이게 한다.
그래서 한때의 소년은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었고, 어머니의 말씀이 이명으로만 들리는 밤에는 “피 맺힌 삭풍 회한이 물레처럼” 감기는가 보다. 수몰 마을에 와서 수몰된 자신을 발견하고 모정의 그리움에 잠기며, 다함없는 회억回憶에 빠져드는 시인의 모습이 동병상련이게 하고 있다.
6. 차 한 잔의 우주를 위하여
청동기의 푸른 하늘 만 삼천 빗금 긋고
동심원 백여 개에 여덟 가지 원을 지어
삼천 년 긴 긴 세월을 다 닦아낸 놋쇠 거울.
그 얼굴에 비쳐오는 번뇌며 물결이랑
천만 가지 죄업들이 그림자로 오고 가도
동그란 마음에 묻어 그냥 말을 잃었다.
살아온 많은 날에 닳고 닳은 흔적으로
가슴에 새긴 원은 깊고 깊은 강이 되고
지금 막 반달 하나가 비쭉 솟아 떠오른다.
- 「다뉴세문경」 전문
손잡이가 있는 ‘잔무늬거울’이라는 뜻의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은 전북 완주에서 출토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되어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는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흔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문화재이다.
백 시인의 「다뉴세문경」은 아득한 청동기 시대로의 여행이다. 첫수는 거울 뒷면의 섬세한 기하학적 무늬를 들추고 있다. 가로세로 교차하는 선과 원과 사각형 등 세밀한 디자인을 한 장식을 “청동기의 푸른 하늘 만 삼천 빗금 긋고”라고 하더니, “삼천 년 긴 긴 세월을 다 닦아낸 놋쇠 거울”로 비약된다.
손바닥만 한 유물을 보며 무심히 지나쳤을 다뉴세문경을 이보다 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또한 “여덟 가지 원을 지어”라 하였는데, 실물은 원圓이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원願으로 읽히니, 이런 중의법 또한 시를 더욱 정감 있게 하는 요인이 된다.
둘째 수는 이제 거울 앞면으로 돌아온다. 오랜 세월 동안 무던히도 거울을 바라보았을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건만, 시인에게는 그림자로 다가와서 거울의 모양마냥 “동그란 마음에 묻어 그냥 말을 잃었다”라고 하였다.
다뉴세문경의 세월도, 시인의 살아온 날도 셋째 수 초장은 어느 하나를 특정하지 않는다. “가슴에 새긴 원”은 거울의 원圓이든, 화자의 원願이든 둘 중 하나이거나 모두일 수 있다. 이런 중의법을 통한 서정성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세상은 다뉴세문경으로 하여 반달 하나가 떠오르는 모양이니 난향유곡蘭香幽谷은 시인의 마음속 경지일까?
속으로만 이뻐할 애 감싸 안아 누이듯이
아침 해 저녁노을 한술 밥에 말아 놓고
칼질로 썰어냅니다 또박또박 자릅니다.
푸념도 섞어내고 소금 간도 치는 사이
심심하고 외로워도 눈물 아니 보인다며
앞 뒷산 진달래꽃처럼 방실방실 웃는 밥알.
사람이 살다 보면 내가 그만 밥이 되듯
다 주고 더 주어도 모자라듯 앉은 김밥
보름달 참 밝기도 하지 그렇듯이 빛납니다.
- 「김밥 고考」 전문
‘김밥’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김밥은 추억이고 현재이며 미래와 함께할 것이다. 김밥을 다양하고 예쁘게 만들어서 먹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만드는 재미, 먹는 재미, 보는 재미를 함께 누리는 김밥이야말로 우리들 삶의 소중한 부분이기도 하다.
「김밥 고考」 의 첫수는 그 중 첫 번째인 만드는 재미이다. 소중한 김밥 재료가 있듯이 화자에게는 “속으로만 이뻐할 애 감싸 안아 누이듯”한 가족이 있는 것, 화자는 그들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마치 하루해를 김밥인 양 돌돌 말아서 또박또박 잘라내고 있다.
둘째 수는 화자 자신의 모습이다. 삶의 과정은 푸념도 있으며 소금 간도 쳐야 하는 것. 그렇지, 남자는 눈물을 함부로 보여선 아니 되는 것. “앞 뒷산 진달래꽃처럼 방실방실 웃는 밥알”의 모습이 소중한 것처럼, 자신 또는 그런 밥알이었나 보다. 그러기에 김밥은 밥이 뭉개지거나 되지 하여 않아야 하며, 그래야 밥알이 온전히 살아나게 되는 것.
셋째 수는 관계 미학이다. 살다 보면 내가 누구의 밥이 될 때도 있다고 한다. “다 주고 더 주어도 모자라듯 앉은 김밥”에서는 김밥의 속성과 화자의 모습을 병치은유로 두어 감동을 더한다. 그래서 마지막 종장에서의 밥알을 보름달로 비약하였는가 하면 김밥을 비유적 이미지로 잘 표현하고 있다.
아기자기 태어난 채 바다까지 굴러가서
거친 풍랑風浪 안아가며 닳고 닳은 너였기에
바닷새 날개 소리가 얼룩으로 묻어있다.
울음도 다 잊고서 고요마저 끊어내면
구름으로 풀어지는 좁고 좁은 그 언저리
빈 하늘 빈 바다 닮은, 별 노래도 놓여있다.
- 「조약돌」 전문
「조약돌」은 닳고 닳은 바닷가의 산수실경山水實景이다. “아기자기”라고 하였으니 그 태생부터 다양하게 어울려 예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렇게 태어난 조약돌의 종착지인 바닷가에 와서 거친 풍랑을 안고 살아가야 하기에 “바닷새 날개 소리가 얼룩으로 묻어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날개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를 얼룩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전환하여 시적 긴장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둘째 수에서 “울음도 다 잊고 고요마저 끊어내는” 절대 공간은 과연 어디쯤일까? 결국 이 세상에는 없는 ‘이상향理想鄕’을 조약돌이 그리워하는 곳으로 본다면, 그곳은 다시 “구름으로 풀어지는 좁고 좁은 그 언저리”라는 현실과 맞닥트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빈 하늘 빈 바다 닮은, 별 노래” 라 하였으니, 결국 일촌광음一寸光陰 무한경無限景을 ‘조약돌’에서 관조하게 하고 있다.
울울한 생각들을 비우면 또 비운 대로
찻물 솰솰 끓는 속에 뜨거움이 떠올라서
앞 뒷산 푸른 하늘이 다기茶器 속에 숨는다.
혼자 앉아 차를 들면 둥근 달도 휘어지고
풀숲에 비 내리듯 만상萬象들이 어려 오고
사위운 근심 걱정이 소매 끝에 흩어진다.
잔에 뜨는 사람살이 곱게 풀린 물레처럼
물이든 찻잔들이 꽃씨마냥 흔들릴 때
푸르른 종소리 울려 찻잔 속에 떨어진다.
- 「차를 마시며」 전문
「차를 마시며」 첫수 초·중장의 인과관계에서 이끌어 낸 반전은 “앞 뒷산 푸른 하늘이 다기茶器 속에 숨는다”하였으니 이야말로 시는 즐거운 상상력이요, 초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의 주술이기도 하다.
둘째 수는 상을 다시 확장한다. “혼자 앉아 차를 들면 둥근 달도 휘어지고”라는 무한 적막의 순간이며, 거기서부터 온갖 상념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근심 걱정을 소매 끝에서 흩어지게 하는 마법이야말로 온 세상을 다 주무르는 시인의 위대한 특권이 아니겠는가?
셋째 수는 시적 표현의 극치이자 직관적 사고력의 대반전이다.
“잔에 뜨는 사람살이” → “곱게 풀린 물레처럼” → “물이든 찻잔들이” → “꽃씨마냥 흔들릴 때” → “푸르른 종소리 울려” → “찻잔 속에 떨어진다”는 구句의 주고받음이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끼리의 상호 간섭현상으로 충첩되어 읽는 이의 마음을 한껏 흔들고 있다.
두보가 이백의 문학적 천재성을 노래한 “붓을 대면 비바람을 놀라게 하고, 시가 완성되면 귀신을 흐느끼게 한다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는 청천벽력 같은 시조 한 편, 차 한 잔의 소우주를 여기서 만나게 한다.
7. 시인의 고고한 아우라가 있는 시조집
발문跋文은 책의 끝부분에 본문에 대한 요약이나 관련된 이야기 등을 길지 않게 쓰는 글이다. 이는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필자의 생각을 유추하여 정리하는 것이며 축수祝手의 의미를 얹기도 한다.
때로는 발문에 올릴 작품이 부족한 경우도 있지만, 백승수 시인의 『윤슬을 위하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들추어야 할 작품이 너무 많다는 것이 아쉬움이자 솔직한 고백이다.
「동자개 천렵」을 비롯하여 「대둔산에서」, 「회양목」, 「바위」, 「춘란春蘭」, 「무자위로 불리는 수차水車」, 「바꾸기」, 「날개」, 「톱니바퀴」, 「라일락」 그리고 「새총」 …
평글로 써도 좋을 작품군이 이렇듯 남아 있으니, 만날 때마다 필자에게 “한강 이남~”라고 말하지만, 보석 같은 작품들을 자신의 곳간에 산적하게 쌓아 둔 배경에서 나온 여유로움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빛나는 작품집을 엮으면서도 “그냥저냥”이라는 겸손이 그의 생활신조로 배어 있다. 목동에서 보금자리를 옮겨, 지금 사는 도봉산 자운봉 아래의 산새 소리 그윽할 만한데, 언제쯤 그의 모습도 이를 닮아 멋들어진 시조의 경景을 새소리로 울어 줄지 누가 알까?
시조는 원래 단수 한 편으로 완결하는 미학에 근거한 민족시이다. 흔히 단시조라 말하지만 이는 연시조가 아니라는 의미의 분류 개념이다. 간결과 논리 그리고 서정抒情에 더한 음성적 리듬감에 존재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윤슬에 대하여』의 편편은 대개 3~4수 연작이거나 사설시조가 더러 보인다.
백 시인의 작품 대부분이 연시조로 길어진다는 것은, 간결하지 않다는 측면이기보다는 다원화 된 현대 사회가 감당해야 할 갈등 상황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작가의 준열한 시정신에 의한 보조관념의 구체화 작업 능력이라고 보아야 온당할 것이다.
그의 시조의 특장特長은 억지스러운(?) 시어를 차용한 구句와 장長 그리고 행간行間의 단절이 아니라, 바로 귓가에 와서 말을 건네듯 편안하게 들려오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조 한 장章에서는 행行을 바꾸지 않는 시조 고유의 형태미학을 견지한다는 점이다. 흔히 자유시의 무분별한 행 나눔과 띄움을 차용한 경우는 그의 시조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음은, 무엇보다 온전한 시詩의 시조가 갖는 자신감 때문이라 생각된다.
『윤슬을 위하여』의 작품을 읽으며 기억에 남은 소재素材와 제재題材를 어디서 다시 만난다면 앞의 작품들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
백승수 시인의 빛나는 시조의 품品과 격格에 비하여 필자의 군더더기가 헛물일 것 같아 조심스럽다. 그것은 마치 흑백의 산수도山水圖만으로도 그윽한데, 현란한 색을 입혀 어지럽게 다듬은 우愚를 범하는 것과 같다. 『윤슬에 대하여』는 우리 문단사에 장쾌壯快한 빛과 거름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둔필을 내려놓는다. 시인의 고고한 아우라가 보이는 네 번째의 시조집 상재를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