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동에서 동래 온천장행 콩나물 시루같은 전차 속. 단정한 교복

에 모자엔 금색 벌을 달고 한 학생이 열심히 두꺼운 영어 사전을 통

째로 외우고 있다. 주위에는  미나리 아가씨( 동래여고)들이 킥킥대

며 웃고 떠들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학생은 가끔 눈을 지긋이

감고 열심히 마음속으로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다. 전차가 거제리

를 지날 무렵 사전 한장이 조용히 뜯겨져 나가 그 학생의 입속으로

들어갔고 잘근 잘근 씹는듯 하더니 꿀꺽 삼킨다.

 그리고 다음장을 외우고 있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사전의 앞 부

분 20 여장은 벌써 그 친구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전차가 없는 시골(밀양)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대-한민국에서 명

문인 동래고등학교에 유학 온 시골뜨기 나에게는 전차속에서 영어

사전을 통째로 외우고 삼키는 그 친구를 며칠동안 경이로운 눈초리

로 관망하다가  어느날 마음속으로 평생의 벗으로 사귀고 본 받기

로 결심했다. 약간 어눌한 말씨에 기웃뚱한 자세로 느리게 행동하

는 그 친구는  항상 책가방이 찢어질듯이 묵직했다.

 자연스럽게 성큼 다가선 나에게 그 친구는 조금도 거리낌없이 모

든 것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부모님과 형님 형수님을 소개시켜주

고 살고 있는 집이랑 공부방까지 보여주고 언제든지 와서 함께 공

부 하자고 했다.

당시 개성중학교 부근 고모댁에서 학교에 다녔던 나는 그 부근에 집

이 있는  이기호,임채국과도 가끔 어울렸지만 특히 그 친구와 그림

자처럼 붙어 다녔다. 백년을 같이 있어도 남에게 병아리 눈물만큼

의 슬픔이나 아픔을 줄 것 같지 않는 착한 천성을 지녔기에 그 님의

주위에는 친구가 많았다. 동래고 동기생 중 그 님의 주위를 지나쳤

던  수 많은 그림자 중 대충 기억나는 친구들은  재경 42기 동기회장

이신 김규호님을 비롯하여 최정린 박진홍 임채국 문연태 장판갑 등

이 있었고 나 역시 그 님의 주위를 평생 떠나지 못했다.

그 님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않았지만 어머님의 막내

에 대한 끔직한 사랑에 힘입어 용돈은 궁하지 않았다.

학생으로서의 용돈 외에 필요한 돈은 어머니와 형님 형수님에게 제

각각 적당한 구실로 타내어 미성극장과 북성극장 관람료. 막걸리 파

티.  등으로 사용했다. 영화 구경은 2주에 1회, 막걸리 파티는 한달

에 1회,  토요일 저녁 비오는 밤이면 부정기적으로 실시했다.

어느 토요일 비오는 저녁 그 친구는 단골 막걸리 집에서 책을 한권

꺼내어 들고 붉은색 언드라인 쫘-악 한  부분을 읽어 주었다.

 "총각 딱지는 남보다 빨리 하루라도 일찍 떼 버려라. 공부가 훨씬

잘 될 것이다." ----- 정말 귀가 번쩍 뜨이도록 반가운 말씀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부쩍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공상때문에 공부를

설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걸리 한 사발로 기분좋게 취기가 오

른 우리들(5명)은  오늘 당장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총

각 딱지를  장가보낼 장소로 근사한 곳을 의논한 결과  부전동 300

번지가 아닌 범일동 마차골목으로 결정이 되었다. 결정이 되면 바

로 바로 실행에 옮기는  우리들의 약관(? )에  따라 국제화학 뒷편

철로길을 우리들 5명은 큰 죄를 지어러 가는 사람들 모양 고개를 숙

이고 묵묵히 걸었다. 우산도 없이 빗속을 얼마나 걸었을까  고향의

봉순이 누나 같은  아가씨가 한명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 얘들아! 풋고추 내가 잘 다듬어 줄께. 따라와! " 순간 우리들은  누

가 먼저 랄것도 없이 그 봉순이 누나가 가리키는 집속으로 우루루

빨려 들어갔다.  안내하는 2층나무계단을 올라가면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아련히 들리는 듯했지만, 그건 나중의 기억이고, 안내된 방

은 우리들 5명이 모두 앉을 수도 없는 좁은 방이었다.

그러나 벽에는 나탈리 우드, 에리자베스 테일러,브리짓도 바르도.마

르린 몰로.등과 이름모르는 수 많은 배우들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

었다. 조그만 책상위에 있는 빨간 전구에서 흘러나오는  진홍색 조

명이 마음을  이상하게 흥분시키면서 야릇한 기대감을 품게 한다.

" 너희들 모두 친구 사이지?  여자 때문에 우정에 금이가면 안되니

까 색씨감은 내가 골라준다. 모두 조용히 눈감고있어. 나 없는동안

에 눈뜨는 놈은 친구하지마! " 조용하면서도 엄숙한 선언을 하고 봉

순이 누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정말 거짓말 같이 모두 고개를 반쯤

숙이고 눈을 감은채 10 여분정도 기다렸을까 ? 조용한 인기척이 나

는가 싶더니 누군가 한 친구가 이끌려 내려갔다.

다시 5분정도의 간격을 두고 또 한명, 내 차례는 언제일가? 초조한

기다림속에 마침내 네번째라고 짐작될즈음 조용히 다가온 한 아가

씨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내리고 있었

다. 말없이 다가와 가만히 씌워주는 우산을 함께 받으며 살며시 얼

굴을 훔쳐본 나는 깜짝 놀라고 있었다. 깨끗한 아름다움-청순한 아

름다움-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로 만나게된 아름다움에 경이로움까

지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방은  50 여 M쯤 떨어진 제법 깨끗해 보

이는 판자집의 2층 이었다.  조금전의 집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모

범 학생의 잘 정돈된 공부방 같은 분위기 였다. 책상위에는 10여권

의책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평소에 내가 읽어보고싶어하던 책

들이다. 톨스토이의 [부활], 또스뜨 에프스키의 [죄와 벌], 까뮈의

[이방인], 스땅달의 [적과흑], 그밖에 소월의 시집 [진달래], 한국

문학전집 등등  한눈에 보기에도  꿈많은 문학소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나온말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 귀에 들려왔다.- " 빨리 옷 벗어! 난 아직도 세탕을 더 뛰어야

한단 말이야 ! " 흠칫 놀라서  똑바로 쳐다 본  그녀의 얼굴에서 짙

은 우수의 그림자를 읽었다. 냉혹한 현실의 비 바람에 찢기고 할키

운 자국이 그녀의 표정에 구름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내 눈앞

에서 무표정한 그녀의 손 놀림은 순식간에 그 녀를 하얀 레이스가

달린 핑크빛이 감도는 손바닥만한 팬티 한장만을 걸친 알몸으로 만

들어 놓았다.  이 누나에게 순간적으로나마 느꼈던  감상적인 온갖

생각은 사라지고, 뽀오얀 그녀의 속살을 보는 순간 내몸의 깊은 뿌

리에서 분기탱천 , 힘차게 내뻗는 힘을 느낀다. 가녀린 그녀의 손길

이 내 중앙청을 - 몇번  ( 우나, 도스, 뜨레스, 꽈뜨로, 싱코---  서반아 어 - 하나,둘, 셋 넷, 다섯)  어

루만지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내 뿌리의 깊은 곳에서부터 폭포처

럼 쏟아져 나온 수억만개의 생명의 씨앗이 그녀의 얼굴에 뿌려졌다.

두루말이 휴지를 풀어내어 말없이 얼굴을 닦고있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채 얼른 바지를 추스러고 준비해간 돈을 책

상위에 얹어놓고 도망치듯이 뛰쳐 나왔다. 돌이켜보면, 나의 총각딱

지는 그렇게 어이없이 떨어졌다. 맨 마지막까지 봉순이 누나방에 남

아있었던 그님의 총각은  봉순이 누나의 따뜻한 보살핌 덕택으로 ,

오초,누에베.까지가는 황홀한 진짜 여행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꿈의 꽃밭길을 거닐고 있을 그님과의 잊을 수

없는 또 다른 추억이 생각난다. 동래고 1학년 시절. 나에게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고향 밀양여고의 2학년 학생이다. 너무나

깜찍하고  예쁘게 생겨서 그미의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 [ 오드리

헵번] 이었다. 토요일 오후면 즐거운 마음으로 그미를 만나기위해

귀향길에 오르곤 했다. 항상 만나는 장소와 시간은 우리 둘만이 아

는--- 은밀한 기쁨이었다. 밀양에는 오래전부터 1년에 한번씩 밀양

부사의 딸 [아랑]이 절개를 지키려다 죽임을 당한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서 [아랑제]가 열리고 있다. 그네뛰기, 윷놀이, 미스 아랑 선발

대회,등 다양한 행사와 더불어 [아랑]을 추모하는 글짓기 대회를 밀

양문화원 주최로 개최하는데 해마다 본교에서도 중고등부 글짓기대

회에 문예부 대표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어려운 문

제가  한동안 나를 괴롭게 했다. 너무나 예쁘기에 [아랑제]에 미스

아랑 선발대회에 출전한 나의 그녀를 본교 문예부 대표로 참가한 형

님이 먼 발치에서 보는 순간 " Fall in love with one sight " - [첫 눈

에 꼴깍 반하다] 해 버린 것이었다. 밤차로 귀가하여 등교해야할

그 문예부 형님은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학교를 결석해가면서 오

직 그녀를 만나기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한 결과 마침내 그녀의 자

치방까지 알아내고 더구나 그녀의 남자친구가 본교 1학년에 재학중

이라는 중대한 뉴스를 가지고 등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밀성중학교

에 다닐때 장원은 한번도 못했지만, 아랑제 글짓기대회에서 차상,차

하 참방을 두루거친 경력이 있는 나로서는 참방도 못하고 돌아온 문

예부 형님이 그리 존경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같은 문예부 선배

로서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코스모스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어

느날, 마침내 그 형님은 나를 불러내어 중대한 얘기를 머뭇거리면

서 털어놓기 시작했다. " 지금부터 하는 예기는 선배로서 후배에게

하는 얘기가 아닌, 사나이대 사나이로서 하는 얘기니까 잘 듣고 솔

직한 너의 심정을 듣고 싶다.  기분 나쁘겠지만,그동안 너에대해서

가정환경,성격 ,장래희망, 취미, 특기 등 웬만한 것은 모두 뒷조사

해두었다. 심지어 1학년이지만, 나이가 3학년인 나랑 동갑이라는것

도 알고있으니 단둘이 있을 때는 나에게 말을 놓아도 좋다. 다만 너

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다. 우선 너만의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던

연미가 나에게 그동안 보낸 편지가 여기있다. 내용을 보면 알곘지

만, 연미도 나를 꽤 좋아하고 있다고 확신 하고 있어. 그리고 난, 우

리집안의 5대 독자야 ! 어쩌면,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결혼해야

할지도 몰라. 연미씨와도 결혼 얘기까지했어! " - 순간  파아란 가

을 하늘이 갑자기 잿빛으로 변하는 환상을 보았다. 너무나 갑자기

뜻밖의 얘기를 의외의 사람으로부터 듣고 심한 충격에 휩싸인 채 그

가 내미는 그녀의 편지(10 여통)를 받아 읽어볼 엄두조차 나지않은

채 난 그 자리를 일어서면서 순간 휘청거렸다. " 여러가지로 미안하

다" 아련히 들려오는 그의 마음을 뒤로 한채 난 그자리를 떠났다.


돌이켜보면, 내가 중1일때, 그녀가 여중 2학년일때부터 만 3년간

을  사귀어 오면서 한번도 그녀의 이름이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

을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의

열병을 앓아야했다. 문예부 형의 말처럼 결혼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는 너무나 아득한 얘기였고 가정형편상 몇년 후에 가능할지 가늠조

차 할 수 없는 나에게 당장 결혼할 형편이 못되면 나에게 양보하라

는식으로 욱박지르며 다가선 현실앞에서 난, 어찌 할 줄을 몰랐다.

며칠을 밤잠을 설쳐가면서 고민하는 나에게 - Mr.사전 -그 친구는

조용히 다음과같은 충고를 해 주었다. " 문예부형이 무엇이라고 하

든지 삼각관계에서는 본인의 뜻이 제일 중요하니까 세 사람이 만나

서 단판을 짓는게 좋겠어. 만약  연미씨가 문예부 형을 선택한다면

추한 모습을 보이지말고 깨끗이 단념해! "-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이 친구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그 뜻을 문예부 형에게 전달하고,

연미랑 셋이서 만나는 장소와 시간은 문예부 형이 알아서 정하기로

일임했다. 그간의 사정을 친구에게 말하고 함께 걱정하며 초조하게

기다린지 며칠 후 과연 문예부 형이 운명의 날짜와 장소를 알려왔

다.이번주 일요일 오후2시 장소는 구포역 출찰구. 연미랑 셋이 만나

서 구포둑을 거닐며 조용히 우리들 의 마음을 서로 확인하기로 약속

했다는 것이다. 일요일까지 앞으로 3일, 어떤 복장으로 나갈까  연

미를 만나면 무슨얘기를 할까 만약 연미가 문예부형을 선택하겠다

면 ?,-----  과연 눈물을 보이지않고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을까 - 수

많은 공상을 하면서 운명의 일요일를 맞이했다. 그런데 막상 약속시

간이 다가오자 엉뚱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사랑하는 여자친구

앞에서 두 남자가 버티어서서 누구를 택할것인지 당장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약속 장소에 나가려

는 발목을 붙잡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내린결론은  그 친구에게 부

탁하는 것이었다. 운명의 일요일 . 전권특사 (?)로 파견된 그 친구

의 전화를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지루했다. 오후 6시경 드디어

그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참고로 그 친구가 전해준 그녀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 인대씨와 K씨( 문예부 형) 두 사람 모두 좋아한

다. 그러나 두 사람 중에서 꼭 한사람만 선택 해야 한다면, 두 사람

모두 포기 하겠다."  다음 날  문예부 형이  찾아와  무척 실망한 얼

굴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사라졌다. " 난 포기 했어. 너 혼자 잘 해

봐 ! "  그 후 우리둘의 관계는  전 보다 더욱 가까워 졌고 내가 고

3, 그 녀가  여대생이 되어버린 1년간 약간의 위기가 있었으나 1년

후 같은 대학생이 되면서 몇년더 계속 되었고 우리들의 꿈결같은 관

계는  그녀가 결혼하는 전 날까지 계속되었다.

지금 이 시각 하늘나라를 여행중인 그 친구와의 잊을 수 없는 추억

은 너무 많아 하나씩 하나씩 소개하다보면, 원고지 1만매의 장편 대

하소설이 될것같다. 이 글을 읽어 주는 분이 100명이 되는 때가 온

다면 또 다른 얘기를 시작 해 볼까 ? ---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