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 이창훈 
| 제목 | 2007, 네덜란드-벨기에 |
|---|---|
| 글쓴이 | 임삼희(58) [ plim32@hanmail.net ] |
| 작성일 | 2007-08-29 |
나를 모르는 세상으로 나가는 것은 도주인가, 오래된 방랑벽인가, 이름 없이 떠도는 별인가. 1월에 독일항공사 홈피에 들렀다가 특가항공 나온 것 보고 잽싸게 클릭, 이티켓 예약. 봄에 유럽 가기는 처음이다. 중국 당국의 승인을 받느라 인천공항에서 1시간 정도 지체한다. 많은 나를 감추어서 무거워도 이륙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본디는 러시아, 발틱 3국을 가려 했는데 모스크바에선 경찰이 여행객들한테 삥을 뜯는다는 소문이 있고 무슨 증명을 요구하고 해서 포기, 에스토니아 쪽은 여행사에서도 자세한 내용을 모른다 하여 우선 프랑풀트로 가서 현지에서 닿는 데로 다니기로 결정, 완전히 집시 모드다. 옆 좌석엔 낯짝이 어쩐지 경망스럽다 했더니 미국 청년이다. 10시간 이상 비행하는데 옆에 좀 얄상한 년 앉으면 어디 덧나니. 니들은 어쩜 판사도 그케 또라이냐. 바지 하나에 얼마라고. 웬만하면 곱게 봐줄라케도 그게 참 어렵다.
러시아 상공쯤이나 됐을까. 승무원들이 승객들에 전채, 주요리 돌린다. 금발의 떡대같은 승무원들이 물어다 주는 기내식이 그리워 인천발 유럽행을 기다리는 면도 있을 것이다. 우리도 남들처럼 한달씩 휴가가면 안될까. 그라믄 나라 망할라나. 마지못해 살게 할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는 악이다. 스튜어디스 언니들 주방에 옹기종기 수저 든다. 가장 상공에서 별 본때 없이 포크질을 하니 먹고사는 일이 시시하고 얼마간 이처럼 일상적일 것이다. ‘why worry’ 올드팝이 귀 익어 감미로운데 내 목소리는 예전처럼 청량하지 않은 걸 보아 사춘기가 다시 오는 모양이다.
아귀 생선요리 맛나고 지상 1만 키로미터 상공, 시속 800 키로미터, 외부온도 영하 50도, 이해되지 않는 독일어를 구사하는 승무원들, 이 이그조틱한 공간은 소설보기 딱이다. 이 맛에 나들이한다. 작년에 파리로 경유하는 바람에 프랑크푸르트 2년 만에 간다. 새색시 친정 가는 기분일까. 2002년 처음 보았던 모습대로 단정하고 봄에는 처음길이라 설랜다. 프랑풀트 공항에서 중앙역 가는 길에 아카시아 꽃향기에 취하다.
프랑풀트 중앙역 인포에서도 발틱 3국을 모른다. 이들도 이쪽으로는 잘 가지 않나보다. 거구의 역직원이 한참 동안 검색하느라 한숨을 몰아쉬고 콜라 한 잔하더니 finish하며 가장 싼 표라면서 내민다. 우선 레퍼반으로 유명한 함불크행 Regio를 예약하고 2002년 처음 유럽에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한 김 사장 가게를 찾아 저녁 먹었다. 그 곳에 아직 체코 아가씨 말린이 일하고 있을까. 새벽 기차에 오르기까지 역사 대합실에 자리를 잡고 잘 채비를 하는데 중앙역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일군의 무리들이 입장. 응원한 팀이 이겼나보다. 깃발을 들고 한참을 떠들고 다닌다. 아무도 제지하지 않고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고 별무반응. 소녀티도 아직 미처 벗지 않은 애가 등치는 스모 선수만 해가지고 파리가 얼굴에 붙은 지도 모르고 벤치에 벌렁 드러누워 잔다. 알콜에 찌든 얼굴의 소년이 온 역사를 돌아다니며 담배 한 가치 동냥한다.
괴팅엔 경유한 함불크행의 이른 아침, 목초지에 피어오르는 안개가 장관이다. 이 안개 속으로 이슬처럼 녹아 사라지면 어떨까. 선암사 가는 길처럼, 소쇄원 제월당 아래 석류처럼 아린다. 흰 소가 풀을 뜯는다. 역사에 흔적을 남기지 않은 간이역을 지나면서 한참을 외롭다. 철로 변에 꽃들이 알록알록 이쁘다. 해당화 같기도 모란 같기도 한 이름 모를 자태가 만화방창이다. 농익은 가시내의 뒷태같은 독일 전역의 구릉지대를 스치면 온종일 걷고 싶기도 하고 하이킹도 드라이브도 하고 싶다. 그러다가 어느 한적한 시골에서 소리 없이 객사하면 행복하겠다. 꿈이라면 일종의 꿈이다.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언제나 그게 마음에 걸린다... 삶의 실감이 급격히 흐려질 때가 있다.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슬프다거나, 우울해진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과는 좀 다르다’(서경식, 디아스포라 기행)
비스마르크역, 하노버역을 지나는데 조그만 마을에 잔디 축구장이 3개나 된다. 볼 때마다 부러워 미친다. 평생을 성냥갑 속에서 살다가 평수 늘이는데 골 빼다가 죽어가는 코리아는 행복한가. 어떻게든 해서 축재를 하고 삽질하고 운하파고 하면 영웅이고 지도자가 된다. 이 괴물에 목하 서울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 반드시 없어져야 하는 당이 나라를 삼키려 한다. 전쟁도 불사한다는 당(2006. 10. 17.), 장애가 있으면 낙태도 가능하다는 당(오마이뉴스 2007. 5. 14.), 누구를 위한 무슨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것인가. 민족도 없고 인간도 없는 망나니들의 돈나라당이다. 미친 개독교는 장로 대통령 운운하면서 하나님 팔아 잡순다(오마이뉴스 2007. 7. 13.) 홍도야 우지 마라.
‘신은 섬김과 믿음의 대상이 되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인간들로 하여금 지상에서 자체적으로 구원과 용서를 구하라 말한다. 이 신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들은 더 이상 신을 찾지 말고 스스로의 힘과 자유의지로 지상의 낙원을 건설하는데 모든 노력을 바쳐야 한다’(이문열, 사람의 아들)
‘큰 교회에 주일날마다 찾아 갔는데 설교 제목은 거창했다. 소외된 자의 친구, 마음 상한 사람들, 어쩌구저쩌구였는데 우리들에게는 얼음처럼 차갑게 대했다...니들 예수 니들끼리 실컷 믿구 닐리리나 부르면서 지금 당장 깨져서 천당들 가거라...설교 제목은 소외된 자의 친구라면서 니들은 주둥아리로만 복음 찾구 사랑 찾는데 좆까는 소리 하지 말어. 교회만 크게 지어 놓구 돈푼이나 긁어모으는 장사꾼들, 나까마(중간소개업자)같은 새끼들이 거룩한 척 목청을 돋구어 세상 죄는 지가 다 걸머진 것처럼 레슝을 떨어? 예수가 다시 오면 이번에는 채찍으루 후려치는게 아니라, 아마 이런 장사꾼의 집은 폭파시켜 버릴거다’(황석영, 어둠의 자식들)
독일 남북으로 길다. 한참을 가는구나. 함불크에 도착해 고대하던 레퍼반 Gross Freiheit 현장을 가보니 인적은 없고 여름도 아닌 것이 땡볕이다. 땅거미가 지고 홍등이 들어 오고서야 이 거리가 되살아나나보다.
함부르크의 밤은
다른 도시와 같지 않다
은은한 푸른 빛의 여인
...
볼프강 보르헤르트, 함부르크에서
함부르크의 밤을 보지 못하고 중앙역 태국인 식당에서 닭고기 볶음밥 너무 맛있어 2접시 해치우고 그 길로 발길을 돌려 암스텔담행 기차에 몸을 싣고 인천서 출발한 여독에 깊이 잠들었는데 옆에서 다 왔다고 깨운다. 비가 내리고 역전 앞이 공사판이다. 호스텔을 찾으려 골목에 들어서는데 방이 다 차서 미안하다고 쪽지가 붙었다. 이거 참 첫날부터 난감하네. 왜 방이 없냐고 물었더니 다 너 같은 놈들이 몰려 와서 그렇단다. 내가 어때서 자식아, 니가 날 알어... 좀 더 가다보니 싱글 룸이 하나 있다고 하여 hotel international에 냉큼 여장을 풀고 물의 도시, 본격적으로 나가본다. 미로같은 중세의 뒷길에 쓰러질 듯한 건물들 사이로 요리조리 시간을 비우고 다닌다.
오래된 성당을 중심으로 골목마다 인산인핸데 세상의 모든 달고 나온 넘들은 물론이고 노인, 아이를 동반한 가족까지 드나든다. 저 놈은 커서 뭐가 될라고 벌써부터 이런 ‘성스러운’ 데를 들락거릴까. 멀 구경하고 다니는고 하니 바로 여기가 그 유명한 ‘red light district’다. 교회당에 종이 울려 시계탑을 보니 새벽 1시다. 이 지성소를 끼고 운하를 넘어 홍등가가 끝도 없이 뱅뱅 돌아 있다. 암스텔담은 소돔성인가. 저주를 받을 것인가. ‘느닷없이 세계가 깊어진다’
아하 이런 데가 있었구나. 이젠 경유지를 이리로 바꾸고 전용기도 LH에서KLM으로갈아 치워야 할레나부다. 가이드랑 같이 온 무리 중에 초로의 할머니가 가이드한테 급질. 너무 육체적이다, 정신적이지 않다고. 그 나이 먹도록 사내들은 정신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좆물 다 빠지고 나서야 겨우 인간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젊은 연인들끼리도 무수히 구경 다닌다. 직업여성의 눈이 이쁘다고 하기도 하고 섹시하다고 하기도 하면서 즐긴다. 둘이서 손잡고 라이브쇼도 보러 들어간다. 일종의 학습욕구도 있었을 터. 한국 여자애 둘이도 돌아다닌다. 쟤들은 저러고 서울 가서는 내숭 떨까. 히잡을 둘러쓴 이슬람 처녀들도 눈요기 다닌다. 명동성당을 빙 둘러싸고 이런 풍경이 연출된다면 어떨까. 하긴 서울은 너무 거룩하니까 어림도 없겠지. 게다가 지 꼴리는 대로 통째로 봉헌까지 하셨으니... 인문학의 기초가 없는 날 것들만 깝치는 서울의 비린내는 언제쯤 가실까. 깔끔하게 추하게 같이 좀 살자.
꼴에 너무 발랑 까진 년은 스타일이 아니라 한참을 고르고 다닌다. 턱 쪼가리가 조디 포스터처럼 반으로 갈라진 불가리아 20살 처녀(?) 베니 방에 가 사력을 다해 섹스한다. 위생 문제로 음모를 다 제거해서 촉촉하지도 않고 벌교 꼬막처럼 졸깃하지도 않다. 2006. 서울의 정사처럼 뜨겁지도 않다. 착 감기고 꽉 끼는 맛이 없다. 유럽에서 언제쯤 거웃 무성한 년을 불두덩 알싸하게 본격적으로 상대해 보냐구. 어둡고 짭짤한 생애에 찰진 욕망의 날들...
한 골목에는 가게마다 무지개 깃발을 내걸고 게이들이 오순도순 모여 앉아 수줍은 사랑을 한다. 가혹한 남녀의 사랑 또는 질척거리는 가족들 사이의 애증만이 다인 한국과는 달리 여기는 모든 사랑이 허용된다. 장애인도 휠체어 타고 당당히 업소를 들어간다. 종사하는 여성도 이를 거부하지 않는다. 섹스는 누구나 자유로이 즐길 수 있는 대상이지 터부시하거나 금기시할 것은 아니다라는 평범하고도 지난한 명제. 평등은 어디까지이고 어디서부터 안 되는 것인가.
신이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은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냥 짐승으로 자연 그대로 살게 내버려 둘 것이지, 뭐든지 짱구를 굴려 힘의 논리를 합리화하고 표만 주면 무조건 통과시켜 준다. 조갑지들이 들고 일어나면 더더구나 꼼짝 못한다. 논리는 없고 마님들 표 얻어 뱃지만 달고 뒷구녕으로 별짓 다하면 그만이다. 뒷골목에서 못하게 하면 지하에서 하는 걸 몰랐더냐. 몸땡이와 머리통의 언어를 구분 짓는 고단한 이분법에서 벗어나고 개념 없는 짓들 좀 고마 하그라.
‘거래라는 측면에서 성매매와 결혼 사이에 크게 다른 점은 없고 성매매는 일회적 거래이고 결혼은 장기적 거래라는 점이 차이...성매매 금지가 필연적으로 조직범죄를 낳고 성노예의 양산을 부추긴다...실제적 조치로 중요한 것은 매춘부들을 기업가로 대접해 마음 놓고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복거일, 한겨레 2007. 6. 27.)
바야흐로 세상의 암컷들은 생물학적 아빠가 중요하지도 않고 결혼할 필요 없이 뛰어난 유전자를 선택하면 된다네(한겨레 2007. 7. 26.). 숫놈들아 정신 차리거라. 넘 일이 아이다. 허우대가 멀쩡하지도 않고 대그빡도 안 되는 유전자 꽝인 넌 어케 할거냐고...
스리랑카인 가게에서 치킨을 다리로만 골라 뜯는다. 어쩜 이러케 살이 통통하고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냐. 태어나서 처음 닭다리가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유럽은 심심찮게 사우스 코리아를 입에 올린다. 한국이 강한데 아직도 미국이랑 문제가 많느냐고 주인장이 뭘 아는 체 한다. 그러게나 말이다. 운하 썩은 물에서 역한 기가 올라오고 쟂 빛 두루미 같은 것이 물에서 올라와 기름진 주점 앞을 서성거린다. 한 때 동인도회사로 지구를 호령하던 나라에 동이 튼다. 숙소 화장실에 변기가 높이 달려 있어 발모가지가 바닥에서 공중부양한다. 그래도 일은 봐야하고 발은 저려 코에 침 바르고 길 나선다.
관광안내소에서 24시간용 I’m Amsterdam 카드를 33유로 주고 산다. 기본적으로 박물관 입장은 공짜고 교통카드 역할을 하면서 각종 할인이 부가된다. 여간 영양가가 아니다. 머리 참 잘 쓰는구나. Van Gogh 미술관에서 고흐의 그림으로 가득한 우산을 여러 번 들었다 놓았다 한다. 망설이다 포기. 접이식이 아니라서 아직도 많이 남은 여정에 일일이 들고 다닐 일이 걱정인 것이다. 대신 바깥에서 암스텔담 풍경으로 뒤덮힌 접이식 우산으로 만족. 미술관을 나오면 암스테르담 여인이 가판에서 음료수를 판다.
반 고흐, 사랑의 고백을 거절당하고, 여자는 남자를 파멸시킨다며 여성혐오증에 시달리다 매춘부 크리스티나를 따뜻한 위로와 생리적인 이유로 찾게 되었으나 부정한 행실을 견디지 못하고 크리스틴과 그녀의 아이를 버린다. 이 후 자책감과 발작, 환각증세를 반복한 끝에 술집여자 리셸을 불러 그녀의 손에 잘라 버린 귀를 주고 조심히 다뤄하고 소리치고는 사라졌다. ‘위대한 화가들은 어쩌면 광인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무한한 믿음과 찬사를 보내는 사람 또한 광인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 박물관 돌아본다. 유럽 대륙에 페스트가 창궐하여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유대인들이 이를 만연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받아 유대인 공동체가 박해를 받아 소멸하기에 이르렀고, 프랑스 대혁명을 전후해서야 유대인들과 개신교도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독한 민족 중의 하나다. 살아남아서 악의 한 축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꼬마들이 열심히 기록을 쳐다보고 있어서 니들 유대인들이냐 했더니 아니라고 한다. 연인이냐 하니까 아니라고 하면서 다정하게 포즈 취한다.
레지스탕스 박물관에 나치 장교들이 사열하는 가운데 앳된 소년소녀들이 매스게임하는 활동사진이 돌아간다. 무엇이 저토록 광분하게 했을까. 나치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 경제공황의 위기를 틈타 집권하고, 죽음에 이르는 그 광풍은 없어지지 않고 시대의 굴곡마다 마각을 들어낸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무지한 대중들은 휩쓸린다. 소위 방구 꽤나 하는 날라리 지식인들이 악다구니다. 2007년 한국에 부는 바람은 순풍인가. X물 튀니까 딸 좀 치지 마라.
‘우리 사회가 어떤 영웅적 해결자를 갈구하게 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심리적 양상은 과도한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게 만드는 부정적 효과를 가질 수 있으며, 이는 현실적이고 건전한 대안을 조직하고 제도화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제도가 아니며 민주주의 역시 후퇴할 수도 있고 권위주의적 반동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의 나치즘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선거라고 하는 민주주의 방법을 통해 나타났다’(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대중의 무지는 개별적인 굴종과 기회주의만을 낳을 뿐이었다. 그 토양위에 착취계급의 영속적 지배가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무지한 대중은 응집력이 없는 모래와 같아, 모래밭을 응집력을 가진 흙으로 변화시키려면 끊임없이 물길을 대야 하는 것이다. 그 물길이 바로 가르침이고 일깨움’(조정래, 태백산맥)
서울아, 내일은 미망에서 깰거니.
굶주린 소년이 저보다 큰 나무통에 온몸을 들이박고 마지막 남은 부스러기 하나라도 긁어내려는 장면에서 이를 보던 초로의 할머니가 흐느낀다. 그 때 당시 저 소년만한 나이에 같은 고통을 겪어서일 게다.
로마에 가지 않고도 대가가 될 수 있다고 자부한 방앗간 집 아들, 렘브란트의 미술관으로 간다. 사스키아가 가져온 결혼 지참금과 그림을 판 돈으로 화려하게 살다가, 사스키아가 30살에 결핵으로 죽으면서 렘브란트가 재혼하면 유산이 무효가 되고 아들을 고아원에 맡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뒤, 렘브란트는 어린 아들의 유모를 정부로 삼고 유산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결혼까지는 하지 않았으나 돈을 뿌리고 다녀 결국엔 빚더미에 앉아 재산을 경매에 붙여도 빚잔치하기에는 태부족이었다.
자화상을 통해 고절감을 투영하고 고독에 저항하려는 절망적인 시도를 한 렘브란트. ‘내가 창녀를 그렸다면 나는 그것이 창녀이기를 원한다. 이런 이유로 렘브란트가 그린 창녀의 얼굴은 나에게 엄청한 충격을 주었다’(빈센트 반 고흐)
렘브란트가 한 에칭 작업을 재현하는 모습 보고 벼룩시장 대충 보고, 어제 묵은 호텔에서 방값을 더 올려 달라고 해서 old nikel hotel로 옮기다. 호텔 여급이 방을 안내 하면서 내 가방 둘을 번쩍 들더니 남자가 겨우 이거가꼬 질질 매냐고 한다. 참 유럽 년들은 힘이 좋다. 아이 둘씩이나 남친도 거뜬히 태우고 자전거로 시내를 활보한다.
꺼억꺼억 물새 우는 소리에 새벽잠을 깨 이른 시간이라 호텔조식을 하지 못하고 나간다. 밤새 욕정을 다 풀어내고 도시에 비가 내린다. 스톡홀름에서 경험한 기억이 있어서 간간이 뿌리는 비에 속지 않고 그냥 맞고 간다. 상징 로고가 XXX인 암스텔담, 미사여구 세 마디의 약자라 하는데, 이 마저도 모조리 X니 불경한 도시, 이 놈들은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인가. 여권마저도 붉은 색에 문양도 화려하다.
브뤼셀행 유로라인 체크인하고 베이글에 블랙 커피하는데 매장 안에까지 새가 날아와 먹거리를 부지런히 쫀다. 옆 테이블에 있던 흑인 여자애 둘이 다가오더니 뭘 그렇게 쓰고 있냐, 그게 어느 나라 글씨냐 묻는다. 한글이라 했더니 이게 자기 나라 글자랑 비슷하단다. 그래서 써보라 했더니 이디오피아 문자란다. 니들 지금 장난하냐. 이게 어떻게 같니. are u playing with me? 솔로몬과 놀아난 느그 조상 시바 여왕이 그닥 미모는 아니었나보다. 어지간하면 니들이랑 같이 놀아 줄틴디, 미안흐다.
버스에 오른다. 이 대륙은 복 받은 땅이다. 버스로 철도로 그냥 어디든지 들락날락 국경도 있는 둥 마는 둥 서울시내 돌아다니듯 한다. 이만한 문명권이 2-3개 더 있으면 남은 여생이 얼마나 풍요하랴만. 기사 확인받지 않고 백인 청년 하나가 올라탔는데 흑인 기사가 오더니 지랄지랄하며 다시 내렸다 타라 그런다. 누구라도 뚜껑 열릴 일이니 가만있겠는가. 도대체 무슨 문제가 되냐고 따지지만 그래도 소용없다. 무조건 내리란다. 목적지를 가자면 아니꼬와도 할 수 없다. 기사가 밖에서 승차권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타라고 한다. 네덜란드의 교통기사는 대부분 흑인인데 이런 모종의 파워가 있다. 담배 물어 보지만 분이 금방 사그라들지는 않을게다. 어쩌겐니, 오늘 일진 안 좋다고 생각해라 마. 버스 안에 그럴 듯한 화장실이 있는 것이 70년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던 그레이하운드를 떠올리게 한다. 네덜란드의 오래된 숲과 늪지를 지나 짙은 초록으로 흐린 북유럽의 하늘 아래 여정이 흠뻑 젖는다. 창 밖으로 점점이 흐드러진 저 슬픈 진홍은 양귀비라도 되는 것인가. 안타까운 지난 날들처럼 빨리 지나가고 다시 오고 한참을 그런다. 이 군락은 선홍빛으로 터져 나가던 안타까운 서울의 사랑이다.
16유로에 온 벨기에 브뤼셀, 온통 빌딩 숲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브뤼셀 자유대학을 다닌 아멜리 노통브는 이해하기 위해서 쓴다고 했다. ‘누구나 자신만의 도덕률이 있는 겁니다. 나는 어떤 행위를 판단할 때 그것이 내게 주는 즐거움을 척도로 삼고 있어요. 관능적인 도취감이야말로 존재의 지고한 목적이며, 그건 그 어떤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아멜리 노통브, 적의 화장법)
투어 버스 타려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 붓는다. 이것이 바로 하루에 한 번은 왔다 가신다는 브뤼셀의 소나기 되시겠다. 1시간 가량 투어버스로 도시 일주를 하는데 도시 전체가 유럽의 행정수도인만큼 팍팍하여 딱히 내려서 돌아다니고 싶은 곳이 없다. 여행자를 향해 손 흔들며 깔깔대던 벨지움의 소녀들만 뇌리에 남아 있다. 한 참 방뎅이 여물고 가슴 터져나는 때에 온 세상을 자궁에 품고 아련한 공주꿈에 빠져 있을 것이다. 이 참에 가고 싶어 했던 발틱 3국행 버스편을 알아 봤으나 오늘 표는 매진되고 내일만 가능하단다. 여기서 오늘 묵을 생각은 전혀 없다. 지도상으로 여러 곳을 전전하고 직원들을 귀찮게 하다가 바르샤바로 최종 결정. 거리가 좀 되다보니 차비도 69유로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낭패인가. 카드 2장이 다 먹지를 않는다. 가지고 있던 현금으로 지불은 했으나 이제부터가 문제다. 폴란드 가서도 카드가 안 되면 정말 사고다. 시차가 다른데 서울에 누구한테 전화하서 돈을 부치라고 해야 되나. 그게 가능하다면 유럽 어디서 돈을 찾나. 보통 큰 일이 아니다. 걱정이 태산이다. 시티 구좌를 만들었어야 했나. 서울 가자마자 카드 교체해야 하나. 마그네틱이 빠가야로 된 모양이다. 출발 시간까지는 무려 한 나절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중앙역에서 요기하고 나오는데 입구 쪽 너른 공간에 한 무리의 아이들이 브레이크 댄스에 몰두하고 있다. 비보이는 지구촌 아해들의 공통어인가. 한 비보이를 사랑하는 한 소녀의 끝없는 구애의 몸짓, 여느 때처럼 한 동안 넋을 잃고 쳐다본다. 침 닦고 차나 타자. 먼 곳에서 한 나절 고독은 그다지 전략적이지 못하다. 민망한 공허...
얼마나 왔는지 누가 잠을 깨우는데 국경 검문이란다. 독일 경찰이 올라와서는 한 청년을 내리라고 한다. 버스는 그대로 간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다. 또 얼마를 갔을까. 날은 새고 깨어보니 베를린이 아닌가. 잠시 쉬었다 간다 한다. 언제 탔는지 반대편 창가에 탔던 아가씨가 하차한다. 밤새 디비 자느라고 올라타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여느 독일애처럼 건장하고 두툼한 년이었는데 아까운 고기를 놓친 기분이다. 베를린은 이처럼 어이없이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르는 곳이기도 하구나. 절대가 상대로 변하는 순간이다. 우상이 그냥 현실이 되는 지점이었다.
우리들 한 시절의 초상들, 지하/형규/석영 류의 우상은 이제 용도폐기할 때가 되었다. ‘가혹하게 단절해야 한다’ 어쩜 그 당에서 14년간 빨대 꽂고 단물 빨아 먹은 자를 지지한다고들 그러니. 제 정신이냐. 차라리 배가 불렀다고 솔직히 말하든지. 니 맘대로 시대정신이냐. 그냥 도지사 한 번 더하겠다고 하믄 그건 받아준다. 독도도 있고 하니 졸개들이랑 모조리 들어가서 14년간 참회하고 나오면 그 땐 니들 진정성을 믿어 주마. 널 찍을 바에야 땅박이한테 같다 바치지, 3등 짜리인 널 굳이 선택할 이유가 머냐고. 대장정이든 대발작이든 다 좋다만 내가 다니는 명산대첩은 더럽히지 마라.
개나 걸이나 때만 되믄 광주 가서 옹알이 좀 하지 마고. 거기가 무슨 시정잡배들 뒷간이다냐. 이런 허접쓰레기들 가지고 여론을 호도하는 기자 나부랭이들 도편추방해야 한다. 공부를 좀 하든지 생각을 깊이 하든지 맘 단단히 묵어야 할끄다. 가을에 와서 베를린, 드레스덴에서 몹시 떨다가 간 적이 있건만 오늘 여기는 베를린의 봄이다. 저 멀리 베를린 첨탑, 제국의회 돔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