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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관학교

박정희의 친일행각은 이제 세상이 알고, ‘눈과 귀를 한사코 닫으려는’ 사람만 모르는 ‘역사적 사실’이다. 오히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친일이 뭐가 문제냐’는 식의 오도된 역사인식이다. 친일진상규명법은 민족의 뿌리와 대한민국 공화정의 토대를 뒤흔드는 이런 ‘반체제·반민족·반국가적’ 착각에 메스를 들이대는 일이다. 그 사상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다는 국가보안법의 반헌법적 법리가 진정 옳다면, 국정원은 이런 천진난만하되 위험천만한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부터 잡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친일을 옹호하고 관용을 베푸는 자, 대한민국의 존립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친일이 뭐가 문제인지는 기회되는 대로 각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일단 오늘은 ‘사실’에 대해서만 짚어본다.

역사 연구자 가운데는 그가 황국신민화 교육의 첨병 노릇을 한 사범학교 출신이라는 점까지 ‘친일 성향’의 한 단면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박정희의 친일이력은 1940년 만주군관학교 입학 때부터 따지는 게 일반적이다. “긴 칼 차고 싶어서 갔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그 시절 그의 사고를 지배했던 것은 출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지간한 지방관리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았던 보통학교 교사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은 모든 ‘친일’의 근본에는 이런 개인영달주의와 보신주의가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민족을 파는 것이다. 훗날 박정희는 스스로를 위해 다른 많은 것들도 팔아 넘긴다.

그 출세의 가장 빠른 경로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택하지 못했던 것은 오직 그가 ‘조센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이미 사관학교는 물론 군관학교 입학을 위한 나이를 넘긴 뒤였다. 이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박정희는 혈서를 써서 만주군관학교에 보낸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고 나를 희생해 국가를 떠받든다는 뜻)’ 누구에게 충성을 맹서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적어도 역사적 기록에 남이있는 것으로는 일제에 혈서까지 써바치며 충성을 맹세한 인물은 박정희가 유일하다. 그의 친일은 ‘문서화’된 것이다. 덕분에 이 일은 만주지역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유명해졌고, 그도 ‘늦은 나이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 박정희를 포함한 만주군관학교 졸업생 사진. 문화방송 제공

오카모토 미노루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한국 이름에서 따온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을 완전한 일본식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다시 한번 바꿨다. 그 시기는 분명치 않은데, 만주군관학교에 이어 일본육사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가 당당한 ‘황국신민’으로 재탄생한 사실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고, 이를 영원히 유지하고자 했던 열정이 강력했음은 엿볼 수 있다.

그가 근무했던 곳은 화북지방에 주둔한 만주군 예하 보병 8군단이었다. 그가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은 보다 논란의 대상이다. 만주군의 역할 자체가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과 중국의) 무장세력을 색출하는 데 있었고, 무조건 3등 안에 졸업해야 직성이 풀리는 ’야심만만한 출세주의자’ 박정희가 그 일에 누구보다 발벗고 나섰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가 근무했던 1944년 후반기에 만주를 무대로 한 독립군 부대가 없었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반면 당시 화북지방이 독립군과 공산유격대의 주요 활동 근거지였고, 유독 조선인 독립군 부대를 토벌하는 작전을 펼 때마다 박정희가 “요오시(좋아)”라고 말했다는 증언도 전해진다. 박정희 소속 부대가 110여회나 독립군 부대 토벌에 나선 자료가 있고, 그가 부대 배치 뒤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한 것도 ‘남다른 토벌 성과’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 박정희가 1942년 만주군관학교 졸업식에서 우등상을 받고 있다.

그러나 황국의 장교로 출세가도를 달리려는 찰나, 해방이 왔다. 당시 박정희는 국제정세에 대단히 어두웠거나, 진정으로 일본제국의 불멸을 ‘신봉’했던 것 같다. 1944년 말이면 이미 일제의 패망기운이 짙어지고 있었는데, 박정희는 그 마지막 썪은 동아줄을 잡고도 자신의 내일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회주의자

이후 4년여간의 그의 행적은 ‘친일’이라기 보다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길이었다. 해방 소식을 뒤늦게 접한 뒤 만주군을 탈영한 그는 1945년 9월 베이징에 들어가 광복군에 가담한다. 당시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고국에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왕의 광복군 규모를 대폭 늘렸다. 혼란스런 해방정국에서 안정적인 ‘세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와중에 박정희도 또다른 동아줄을 거머쥔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의 냉대로 광복군의 고국행이 미뤄지자, 박정희는 이마저 포기하고 혼자서 배를 타고 부산항으로 들어온다. ‘진짜 광복군’이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귀국 이후에도 임정이나 광복군 등과 ‘인연’을 끊은 박정희는 대신 1946년 9월 막 창설된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광복군이 해방 이후 정국의 ‘실세’로 거듭 나는 데 실패할 것이란 걸, ‘동물적 감각’으로 간파했는지도 모른다.

이후 있었던 그의 좌익 행적까지도 ’기회주의’로 축약된다.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한 지 열흘만에 대구에서(지금의 그 ‘대구’다!) 인민항쟁( 1946년 10월1일 좌익의 주도로 일어난 대중봉기사건으로 대구 폭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이 일어났고, 사회주의자였던 박정희의 형 박상희(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부인인 박영옥씨가 박상희의 딸이며 따라서 김종필 전 총재는 박상희씨의 사위인 셈이다)는 고향인 구미에서 봉기를 주도하다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이 일을 계기로 박정희는 당시 남로당 지도부와 인연을 맺는다. 남로당 입장에서는 주요 지도자의 동생이자 엘리트 군관교육을 거친 박정희가 매력적인 ‘포섭 대상’이었다. 박정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해방직후의 좌익 세력이야말로 광범한 대중적 기반을 가진 가장 강력하고도 유력한 정치세력이었다.

여순반란

△ 1960면 5·16쿠테타 직후의 박정희.

이후 박정희는 출세의 동아줄을 ‘반공 장교’로 바꾼다. 5·16 쿠데타조차도 그가 군인으로서 진급의 길이 막히자 ‘출세·영달을 위한 마지막 올인’으로 선택한 길이었다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로, 그는 참으로 기민하게 출세의 길을 바꿔가며 개인의 영달에 성공했다.

그의 ‘친일’은 거기서 끝났을까. 친일진상규명법의 조사범위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그후로도 오랫동안 박정희는 ‘사상적·정서적 친일’ 상태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는 흔적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구체적인 증언들도 적지 않다. 틈나는 대로 주일 대사관을 통해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구해 관람하고, 니뽄도를 걸어놓고 일본 검도로 ‘심신을 단련’했으며, ‘밤의 대통령’이 다스리는 신문사의 간부들과 어울려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며 술자리의 여흥을 달랬고, 심지어 집무실에서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만주 벌판에서 말 달리던 시절’의 향수에 젖기도 했다는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정열이 부럽다

대통령이 여가시간에 혼자서 뭘하던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정신세계는 결국 쿠데타 이후 친일외교정책의 뼈대를 이루게 된다. 쿠데타 직후 가장 먼저 친선사절을 보내 쿠데타 지지를 호소한 나라가 일본이었고, 군사정부의 첫 대외정책이 한일 교섭의 재개였으며, 이는 굴욕적인 한일협정 체결로 이어진다. 일본 방문 중 도쿄의 한 요정에서는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라며 유창한 일본어로 일본 정치인들을 놀라게 한 일도 있다고 한다. 여기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1963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당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는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라고 말하며, ‘돈독한 관계’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의 박근혜 의원은 이 ‘사실’을 보지 않으려 한다. 아버지가 살인자라 할지라도 자식된 도리로 아버지를 숨기는 게 당연하다고 가르치는 유교 윤리에 따르자면, 박 의원에게 아버지 박정희의 친일행위를 모두 인정하고 사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가혹한 일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일에 ‘침묵’하게 내버려 두는 것까지가 이 사회가 인정할 수 있는 최대한의 관용이 아닐까.

그러나 한나라당 전 대표는 이 일에 침묵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과거의 구태와 절연하겠다는 한나라당으로선 그들을 따라다니는 부패, 수구, 냉전, 친미, 친일 이라는 낙인을 어떻게든 벗어나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몇몇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이 이번 개정안 발의에 동참한 것은 이를 인식한 결과다. 지금까지의 정치전개 과정을 보자면, 보수세력 쇄신의 적임자인 것처럼 대접받는 박 의원 역시 ’과거 청산’의 대열에 동참해야 옳지 않았을까.

다시 한번 그러나, 박 의원은 다른 길을 택했고, 덕분에 한나라당 쇄신의 전망과 대국민 이미지는 뒤죽박죽이 돼버렸다. 이 과정에서 박 의원이 ’인륜의 도리’와 ’정치의 도리’ 사이에서 인간적 고뇌를 겪은 흔적조차도 없다. 그는 너무나 쉽게 어느 한쪽을 택했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냉소적인 반응이 나온다. ‘수구꼴통’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와질 길은 다시 한번 멀어졌다.

정치적 교과서

보다 근본적인 딜레마는 일부 소장파를 포함한 한나라당의 신진세력이 그 이념지향으로 ‘성장·개발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데 있다. 박세일·박형준 의원 등 이른바 ‘신보수 세력’을 포함해 절대 다수의 한나라당 의원들은 박정희 시대의 성장주의를 21세기적 상황에 맞게 다시 구현해 내는 것이 한나라당의 유일한 활로라고 믿고 있다. 정치전략상, 그리고 그 이념지향상, 박정희는 결코 ‘폐기’되거나 ‘청산’되서는 안될 정치적 교과서이다.

하여, 2004년 현재 아버지 박정희와 딸 박근혜는 미묘하고도 복잡하게 ‘착종’돼 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복잡한 방식으로 친일과 군사독재, 그리고 오늘의 한나라당이 하나의 동아줄을 부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거 썪은 동아줄이란 걸 빨리 알아차린다면, 진정한 보수정당으로 거듭나려는 ‘일부’ 뜻있는 정치인들의 꿈도 정당한 평가를 받을텐데, 그 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 한나라당에선 다시 한번 과거 ‘냉전의 용사’들을 주축으로 탄핵 정국 이전의 ‘대여 강경노선’으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 박정희가 대통령에 선출된 뒤 군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지금 60여년에 걸친 거대한 ’쓰리쿠션’은 ‘삑사리’ 나게 생겼다. 아버지가 친 공, 그 딸이 굳이 받으려 하지 말고, 그냥 역사의 심판에 맡겨두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오늘의 한나라당에 보내는 간절한 충고이기도 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역사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죽고 사라진 오늘에 와서야,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공적인 국가 기구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는 것을 허락했다. 지금 가슴 아픈 것은 이제서야 그 일을 시작하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피멍든 가슴에 정치의 이름으로 침을 뱉지 말라.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한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