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아래 더 이상의 흥정은 없다.

햇살은 한여름의 열기로 더욱 뜨거운 오후,
토요일의 도심은 더욱 분주하다.
늦은 저녁 한잔을 기울이는 모임에는 두어번 참석을 했지만
이렇게 야외 나들이모임은 처음이다.
처음이라는 것은 늘 그렇듯이 약간의 설레임을 동반하고,
특히나 동고의 전통속에서는 체질적으로 선배님들과의 미팅은 긴장을 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몇 번의 모임으로 그나마 익숙해진 탓인지
한분 두분 오시는 선배님들의 얼굴이 친숙하다.
부부동반으로 참석하신 선배님들의 모습은 참 아름답다.
그 즈음에는 저런 모습으로 나도 살아가리라.

백두관광버스의 기사양반,이미 이채근선배님과는 안면이 있는 듯하고,
서글서글한 눈매나 입담이 준동고인이다.
도심을 빠져나가는 차량들로 고속도로는 이미 만원,
길을 아는 것이 절반의 생을 수월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듯이
이미 익숙한 세상,샛길을 들어서 무난하게 진행한다.

평창,흥정계곡,
고도가 높아선지 귀가 멍하다.
귀만 멍한 것이 아니라 눈까지 멀어진다.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맑고 높게 보여서 시야가 확 트인때문이다.
가끔씩 오고가는 이런 여정말고,아예 이런 곳에서 뿌리까지 내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하늘민박의 주인장,김찬익선배님이 불현듯 몹시도 부럽다.
그 분의 얼굴도 하늘만큼이나 맑고,미소 또한 계곡만큼 깊다.

서울을 떠날 때에는 더위로 숨이 차오르더니,웬걸 이 곳은
어깨를 움츠릴 정도로 한기가 돈다.
예상치 못한 몇몇 분은 준비부족으로 짧은 반팔로 추위를 견뎌야했고,
다행히 나는 긴 팔 잠바를 준비해두어 무난히 즐길 수 있었다.
미리 예약해 둔 식당에서의 저녁식사,빠가사리매운탕,
들어보기는 했어도 먹어보기는 처음,
혀끝을 스치고 식도를 타고 흐르는 맛이 일품이다.
주말탓인지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손님으로 종업원 한사람이 몹시도 분주했지만,
오랫동안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시원한 제 맛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이미 하늘은 칠흙으로 물들어 있고,
더없이 높고 맑은 하늘 탓에,별들이 더욱 선명하다.
몇해만이던가,
하늘의 별을 보며 별자리를 따라 꿈을 그리던 시절,
이 즈음의 나이고개에서도 다시 꿈을 그릴 수 있음은 전적으로 이런
선배님을 모신 덕이 아닌가.
이래저래 나는 복많은 놈은 분명하다.

펜션의 마당에는 번개탄 위에서 삼겹살이 노릿노릿하게 익어가고,
이우달선배님께서 직접 담아오신 솔잎으로 만든 곡주에 취하니
신선이 따로 없고,무릉도원이 부럽지 않다.
시간은 흐르지만 취기는 오르지 않는다.
캠파이어의 불꽃이 잦아들자 금새 또 보충하고,
김찬익선배님께서는 불꽃을 키우기위해 윤활유까지 뿌려댄다.
저 사랑에  어찌 감동하지 않으랴..
더불어 이재곤선배님의 기록과 같은 선명한 추억들,
어떻게 그리 선명하게 간직할 수 있을까.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그리움이 큰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나 고향을 품고사는 사람은 골목길하나하나의 구비를 죄다 떠올리듯이
그 분의 생은 모두가 그런 그리움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뒤로 꽁지처럼 땋아올린 그 헤어스타일도 아마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감히 넘겨 짚어본다.

내일을 위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잠을 청한다.
새벽 3시가 지나고 있다.
뒤척이는 소리에 눈을 뜨니,바지런한 몇몇 선배님이 벌써 일어나 계신다.
새벽 5시30분,
이런 곳에서 잠으로 보낸 두어시간이 갑자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억지로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세우며 자리를 정리한다.
이미 창 밖에는 햇살이 눈부시다.
간간이 들리는 물소리,새소리,
비로소 나도 살아서 있음을 새삼 절감한다.

흥정계곡에서 허브농장으로 오르는 길,
넓은 계곡과 가파른 경사가 보는 이를 압도하지만,깊은 맛은 비할 수가 없다.
새벽같이 서두른 탓에 입장료는 면제를 받고,허브농장의 처음과 끝을 샅샅이 훑어본다.
그 정성이 대단하다.
그 사랑이 대단하다.
돈을 지불하더라도 그만한 가치는 충분하다는 느낌이다.
코끝을 스치는 허브향,
새벽바람과 더불어 나를 흔든다.
발길을 돌려야하지만 쉽지가 않다.

다시 영동고속도로,그 끝 주문진으로 간다.
우리는 바다의 자식들,그 내음을 맡고서야 적성이 풀릴 듯,
시원한 갯바람과 싱싱한 활어회가 미리부터 선하다.
역시나 기대만큼 상큼한 맛과 통쾌한 전망이 우리를 충족시키고도 남는다.
어제 밤, 이재곤선배님이 모든 관중을 잠못자게 한, 남근과 여궁의 조합,그 하나가 여기 이 바닷가에서 도끼에 찍힌  모습으로 서 있다고 했으니,분명 확인은 하고 갈 일이다.
떡하니 벌어진 모습이 손을 많이 타게도 생겼다.
가운데 틀어박혀보니 기(氣)는 확실히 전해온다.
기(氣)만 느끼면 무얼할까..일단 텃밭부터 구하고 볼 일이다.

정오를 넘긴 시간,
다시 햇살은 타오르기 시작한다.
아쉽지만 내일을 위해 또 오늘을 서둘러야 할 시간이다.
노련한 기사양반,예의 그 익숙한 길로 무사히 서울로 당도한다.
하룻밤을 같이 한 인연을 하나 더 붙인 나,
선배님들이 더욱 익숙하고 더욱 정겹다.
아마도 이런 느낌하나로도 삶은 그리 벅차지 않을 성 싶다.
흥정계곡을 이미 품어 본 나,
더이상 인생을 흥정할 여지는 없다.
앞으로 계속 전진이다.

좋은 여행의 추억을 마련해 주신
함께한 월봉회의 선배님,그리고 형수님들께 감사드리며
내내 행복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