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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거지 목사, 첫인사 드립니다 |
| 글쓴이 |
김홍술(51)
[ hongsulk@korea.com ]
/ 2004-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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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꼬지 목사, 김홍술의 사는 이야기(1)
2월 6일,
아내와 나는 개학을 앞두고 기어이 호젓한 교외 기도원을 찾기로 나섰다. 우선 양산의 국민은행 지점을 들렀다가 돌아서 김해 생철에 있는 무척산으로 향하기로 했다. 아이들을 멀리 보낸 터라 냉장고 아래에 쳐 박혀 있는 설날 사과와 부활의 집에서 가족들이 몇 개 집어 준 빵 등을 비닐봉지에 넣고 차에 올랐다.
우리는 범어사를 지나 노포동에서 양산을 넘어가는 고갯마루를 구비 구비 지났다. 지난 해 이 때쯤 아이들과 네 가족이 판문점까지 걸어 출발했던 길이기에, 아내와 나는 그 때 추억에 젖어 이야기에 무언가 잊은지 모르고 달리고 있었다.
"아, 그걸 안 가지고 왔네"
어느덧 양산 시가지에 들어서자 시청이 보였고, 보자마자 나의 뇌리에 '번쩍' 하며 중요한 준비물을 빠뜨린 것이 생각났다. 그것은 '채권' 이었다. 우리는 차 머리를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내는 '차 기름 아깝다'든지 '시간이 아깝다'든지 아예 입에도 담지 말라고 하며 연방 즐거운 표정이다. 왜냐면 지난해 여름방학 때부터 벼르다 노친 그 '채권'을 찾아 옷이라도 건질까 기대가 사뭇 큰 모양이다.
사실 그 '채권'은 역사가 있는 물건이다. 1992년, 아내가 나와 의견을 맞서가며 눈물로 아파트 하나를 분양 신청한 회한이 어려있는 것인데, 싹수가 노란 남편과는 평생 아파트 구경도 못하겠다 싶어 부산의 외각 덕계에 마련한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빈민선교를 하겠다고 하던 개인사업(노가다?)을 그만 둔 상태였기에, 아파트 장만을 위한 자금 조달은 아내의 몫이었다. 하필이면 때가 때인지라 빈민선교의 깃발을 든 장본인이 자기 집부터 마련하겠다는 꼴이 되었으니, 의기 투합한 동료들로부터 신뢰에 금이 갔고 아픈 상처로 남게 된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 당시 나는 철거민 동네를 쏘다니며 주거권 (빈민)운동을 하였고 부랑인(노숙자) 선교회를 조직하여 막 출발한 즈음이었다.
우리는 그 아파트를 분양 받은 이 후 입주 때가 되어도 입주를 하지 못했다. 새집에 들어 가보지도 못하고 남에게 전세를 내 주어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2년 뒤에도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세를 주었다. 왜냐면 첫 번째는 전세금을 받아 빌린 처형들의 돈을 갚아야 했고, 두 번째는 전세금을 부활의 집 얻는데 몽땅 보탰기(빌려 준 것이지만)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는 어쩔 수 없이 싫던 부활의 집으로 들어와 함께 살아야 했다. 구포에서 그렇게 한 지붕에 들어와 공동체로 어울리다 보니 어언 3년을 보냈고, 1997년 봄 우리는 덕계의 집에 드디어 감격스럽게 입주하였다. 그러나 3년 후 다시 3000만원 전세로 내어주고 1000만원 대출을 받아 장전동으로 나왔는데, 31평에서 16평으로 줄여야 했고 거기서 3년을 살았다. 그 해부터 수년을 덕계 아파트를 팔려고 했으나 너무도 가격이 하락하여 머뭇머뭇 하며 지나던 중, 2003년 봄 드디어 팔았다. 그것도 꼭 10년만에- 우리는 샀던 그 가격에 150만원 밑진 딱 5000만원에 끝냈다.
아내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집이 좁아 친구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아이들의 사연을 내게 호소해 왔다. 자신은 어쨌든 나와 억지라도 함께 할 수 있지만 아이들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6000만원을 손에 쥐고 모험을 하기로 하였다. 어머님이 가까이 계신 구서동에 28평 아파트를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1억 2천 5백 만원, 참으로 놀라웠다. 또다시 아내는 6500만원을 만들어 냈고 일은 해 냈다. 나는 그저 뒷치닥거리만 할뿐이었다. 서류 들고 관공서나 금융기관에 왔다 갔다 하는 것만 내 몫이었다.
바로 그 때였다. 이삿짐 서류를 뒤척이다 그 '채권'을 발견한 것이다. 도합 34만원, 아내도 기뻤고 나도 기뻤다. 그 눈물의 덕계 아파트를 정리한 기쁨의 보상이 감추인 보화처럼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방학 때를 잡아 양산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분주히 여름 방학을 보내 버렸고 올 겨울 방학엔 기어코 해 치우자고 약속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온 우리는 채권을 챙겨 부랴부랴 차 머리를 다시 양산으로 몰았다. 내 옆자리에 앉은 아내가 봉투를 열고 한참인가 채권을 보더니만,
"어! 여보, 이 채권 뒷면을 읽어 봤어요?"
"아니."
"잠깐 차 좀 세워보세요."
이게 웬일인가. 8개 항목으로 된 문구가 있는데,
"4. 이 채권은 발행일로부터 5년이 되는 날에 상환하며…"
"5. 이 채권의 상환일 후의 이자는 지급하지 아니한다."
"6. 이 채권의 소멸시효는 상환 일로부터 원금은 5년, 이자는 2년으로 한다.(국채법 제 9조)"
"…"
채권의 앞면을 다시 살펴보았다. '발행일 壹九九參. 參. 參壹, 상환일 壹九九八. 參. 參壹, 매출일 1993. 3. 31' 이렇게 분명히 파란 고무인으로 찍혀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1998년 3월 31일부터 2년 이후에 이자는 받을 수 없고, 5년이 경과한 2003년 3월 31일 이후에는 원금까지도 받을 수 없다는 말일까? 아내는 애써 '그래도 그렇지'하며 무슨 수가 있지 않겠느냐며 창 밖을 무심히 쳐다만 본다.
우리는 국민은행에 도착해 주택은행으로 찍혀있는 채권을 들고 조용히 창구의 여직원에게로 다가갔다. 약간 긴장하며 채권을 내 밀었던 나와 아내는, 그 여직원의 한 마디의 간결한 대답에 애써 표정을 감추며 재빨리 나와야 했다. 갑자기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밀려왔다. 그래서 나도 몰래 아내의 손을 말없이 잡고 차에 올랐다.
"여보, 미안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
차는 무심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아내는 비닐봉지에서 쭈그러진 사과를 꺼내 깎아 한 조각씩 입에 물려준다.
"쭈그러져도 다네."
"…"
"다- 내 탓이야, 미안해. 마음 풀어."
"개학 전에 옷이나 사 입을 줄 알았는데…"
"무척산 이제 다 왔어."
아내는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훔치는 것 같았다. 내 마음도 안쓰럽고 그랬다. 옛날 아내와 처음 만나 1년여를 다니던 '도요'로 가던 길로 접어들었다. 길이 많이 달라졌다. 넓어졌고 곳곳이 공사하느라 파 헤쳐져 있었다. 예전 아름답던 산길 굽이굽이가 이젠 말이 아니다.
우리는 모은사(母恩寺) 아래에 차를 세워두고 무척산 기도원 팻말을 따라 올랐다. 정말 무척 오랜만이다. 이곳 무척산 기도원이 오랜만이 아니라 기도원을 찾는 일이 오랜만이었다. 유래 없는 가뭄에다 볼품없이 가지만 앙상히 남은 겨울 산이지만 무척산의 아름다움은 절경 그대로였다. 나는 아내의 손을 끌어 주기도하고 엉덩이를 밀어주기도 하며 가파른 산길을 더듬어 올랐다. 두어 번 쉬어 가면서 올랐는데도 겹겹 산들이 멀리 늘어선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외투를 이미 벗어 들고 올라왔건만 이마에 땀방울이 맺는다. 키 작은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이젠 시원하다 .
"여보."
"응"
"대전에 그 김 목사님이 그러는데, 나보고 쉬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단다. 너무 지쳐있는 모습이라네?"
"거 봐요,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더니만…"
"미안해, 그렇게 하도록 할게."
"한 달에 하루만 잡아요."
"그렇게 될까? 해 봐야겠지."
무척산 기도원의 모습은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돌로 쌓은 본 예배당 건물과 종각, 그리고 낡은 슬래이트 건물의 부대 시설들, 모두 정겹고 은혜의 동산 그대로였다. 인적은 없고 바람만 쌩쌩 귀를 아리게 불고 있다. 기도원 곁엔 환상 같은 저수지가 있는데 이름이 '천지못'이다. 정말 백두산 천지를 너무 닮았다. 절벽처럼 가파르게 정상을 올라왔는데 웬 저수지인가 할 정도로 의아스럽다. '천지못'은 꽁꽁 얼어붙었는데 가끔 응결하는 소리인지 '쩡-쩡-' 하며 신기한 소리를 낸다.
우리는 조심스레 본 예배당에 들어갔다. 마루판으로 된 넓은 예배당 뒤쪽에 방석을 깔고 나란히 무릎을 조아렸다. 그리고 천천히 전면과 천장, 그리고 사방을 훑어보았다. 오랜 동안 이곳서 뜨겁게 기도하며 하산했을 수많은 성도들이 생각난다. '그래, 그 모습 그대로 이어주어야 할 터인데…, 요즈음은 기도원도 도떼기시장이 되어버리는 세태인데, 변치 말아야지.'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머리를 숙여본다.
"여보, 내가 잠시 기도 할께."
우리는 5분쯤인지 10분쯤인지 간절히 기도를 마치고 일어섰다. 그리고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쳐다보며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 하산을 서둘러야겠다고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2004. 2. 8 김홍술 씀
왕꼬지 목사, 김홍술의 사는 이야기(2)
3월 1일 월요일,
저녁 6시 30분 약속 시간에 맞추느라 차를 재주껏 몰았지만 결국 5분 정도 지각하고 말았다. 식당에 들어서니 벌써 우리 부활의 집 가족들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고, 그립던 손 전도사님이 환한 웃음으로 일어나 맞아준다.
"목사님, 어서 오세요."
"아이구 손 전도사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손이나 잡아봅시다."
"아이, 목사님도 여전하시네."
"어, 수영씨도 왔네. 잘 왔어요. 반갑다."
같이 온 장 전도사님도 참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자리에 앉았다. 부활의 집에서 독립해 나가 사는 김 형제님과 한 형제님도 찾아와 주었다. 최 권사님은 곧 도착하신다고 연락이 왔단다. 보름 전쯤일까, 손 전도사님이 귀국을 했다며 돌아가기 전 꼭 부활의 집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싶다고 전화 통화 한 후 오늘로 잡았던 것이다.
"목사님, 뭘 그렇게 보세요?"
"여긴, 다 비싸네."
"괜찮아요 목사님, 오늘은 제가 넉넉히 쏘께요."
해물탕 4인분이 2만 5천 원에 밥은 따로였다. 게다가 음료수는 별도이니- 우리식구들이 이곳에 예약을 했는데 어쩐지 마음이 무겁다. 나는 가족들에게 손 전도사님을 소개했다. 2년 전 우리선교회 간사로서 3년을 일했고, 남편의 사업 따라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 그간 계시다 돌아오셨다고- 모두 박수로 화답했고 손 전도사님이 일어나서 인사말을 이었다.
"여러분 우리 가족들을 만나 뵈니 정말 감사합니다. 새로 마련한 부활의 집도 너무 어울리고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발리에서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여러분을 생각하며, 우리 선교회와 가족들을 만난 것을 제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은혜라고 믿습니다. 거기 원주민 빈민가도 자주 찾게 되었어요. 거기서 만난 사람들도 어쩌면 그렇게 우리 부활의 집 가족 같은 지 몰랐습니다. 앞으로 더 건강하시구요, 목사님과 함께 믿음으로 사시기 기도할께요."
나는 감사의 기도를 마음깊이 담아 인도했고 즐거운 식사시간은 모두 행복했다. 모두 식당을 빠져 나올 때, 나는 손 전도사님께 차 한잔하고 가라고 붙잡았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쉽다는 생각에 강권하여 주변에서 지하다방 한곳을 찾았다. 하필 겨우 찾아 들어온 다방은 퀴퀴한 냄새에다 후지게 생겼다. 손 전도사님과 최 권사님 장 전도사님 수영씨, 그리고 김 형제님과 한 형제님에 나 까지 모두 여섯이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 장 전도사님과 수영씨가 연신 얼굴을 서로 마주치지 못하고 빨게지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장 전도사, 올해 몇 살이고? 사귀는 사람 있나 없나 말해봐라. 어서"
장 전도사님은 얼굴을 숙이며 작은 손사래를 치면서 없다고 하였다.
"목사님, 장 전도사 수영이하고 올해는 짝을 맞춰주세요"
"그러죠. 그 동안 손 전도사님이 없어서 무심히 지났는데, 오늘 보니 서로 뜨거운 뭐가 있는 것 같네요."
"이젠 목사님이 잘 하셔서 신혼여행은 발리로 보내주세요. 거기선 제가 책임질께요."
"야! 장 전도사님, 금년엔 해결해야겠다. 준비할게 뭐 있어, 맨몸으로 그냥 뛰어 드는 거야."
"…"
"안되겠어, 지금 전화번호 서로 교환해. 어서!"
나는 쪽지 하나를 꺼내 찢어서 두 사람의 핸드폰 번호를 따로 적어 건네주었다.
장 전도사님은 우리 부활의 집에서 믿음으로 거듭났고 헌신하므로 내가 신학교 입학을 주선하였더니 어느덧 대학원 과정 3학년이나 되었다. 그리고 수영씨는 신학교 졸업 후 보육교사 자격을 취득해 현재 교회 어린이 선교원 교사로 일하고 있다. 수영씨는 손 전도사님이 우리 선교회 간사직을 맡고 있을 때 다니던 같은 신학교 후배였는데, 손 전도사님이 자주 사무실에 데려오곤 했던 분이다. 장 전도사가 신학교 야간부에 다니므로 나는 사무실에 손 간사님을 도와 일하라고 보조 간사로 임명하였는데, 그 시절부터 손 전도사님은 두 사람에 대해 그렇게 공을 들였었다. 그런데 그런지 벌써 5년이나 지나버렸으니 손 전도사님의 애절한 바램은 정말 큰누이 같고 맏언니 같은가 보다.
화살은 이어 한 형제님에게 돌려졌다. 한 형제님은 장 전도사님과 비슷한 시기 비슷한 나이에 부활의 집에 들어와 남다르게 손 전도사님의 눈에 들었다. 오랜 동안 흔들림 없이 살다 작은 아파트 하나를 준비해 나갔고 15인승 승합차 하나를 구해 학원 운전기사로 일하던 중, 둘도 없는 동생의 일로 충격을 받아 최근 흔들렸다가 겨우 추스리고 일어선 가운데 있다. 최 권사님이 먼저 말을 이었다.
"목사님, 장 전도사님은 이제 다됐으니, 한 군도 해결해야지요."
"아참, 한 형제도 나이가 비슷하제?"
"장 전도사님 보다 한 살 아래 서른 여섯 일겁니다."
"와- 다들 나이 많이 됐네."
나는 손 전도사님께 부탁의 말을 꺼냈다. 우리 부활의 집 출신 가운데 어느 정도 자립을 해 살지만 우리나라의 여러 상황으로 볼 때 삶에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있으니, 내가 추천하는 자가 있으면 왕복 비행기만 태워 보낼 터이니 받아주실 수 있냐고 물었다. 손 전도사님은 생각해 볼 것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목사님이 보내시면 언제든지 오케이란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목사님도 사모님과 함께 꼭 오랜다. 얼마 전 목사님을 통해 알게 된 외국인 노동자 선교하시는 정 목사님도 다녀가셨다면서, 목사님도 쉬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일침을 주었다.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아쉬운 작별을 해야했다. 손 전도사님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나더러 장 전도사와 수영씨를 구포역 앞까지 태워 달라고 주문한다. 둘 다 김해 방향이니 같은 버스로 가도록 해야겠다는 심산이다. 다방을 나와 우린 모두 악수하면서 기약 없는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장 전도사와 수영씨를 태웠다. 구포역 앞에 이르자 늦은 밤 한 두 방울 봄비가 듣고 있다. 둘을 내려주고 나는 어둠 저 너머 육교를 올라 건너는 두 남녀를 지켜보았다. 혹 떨어져 가지는 않을까? 둘은 나란히 뭔가 얘기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었다. 참 보기에 좋았다.
2004. 3. 9 (부활의 집에서 김홍술 씀)
왕꼬지 목사, 김홍술의 사는 이야기(3)
세상 많고 많은 교회 중 우리 교회
세상 많고 많은 교회 중 우리 교회의 이름은 애빈교회(愛貧敎會)
가난한 자를 사랑하는 교회인가
가난한 교회인가
아님, 둘 다인가
부산의 낙동강 자락이 내려다보이는 구포 산기슭 아담한 기와집 한 채
정원을 꽉 매운 나무들과 탱자나무 담장을 너머
잘 맞지 않는 찬송소리가 산기슭을 타고 내려온다
주일날이 되면
부활의 집의 하루변신
세상에 아무도 찾아주지 않고 찾아 갈 곳도 없는 20여명 남짓 형제들이
아침부터 부산을 떤다
마당도 쓸고
마루도 닦고, 방도 닦고
창문도 활짝 열어 퀴퀴한 냄새를 털어 낸다
가로세로 아홉 자 열 자, 방 두 칸을 터놓은 침실 겸 거실이
마침내
거룩한 예배실이 된다
방 중앙 20인치 텔레비전은 오늘은 쉰다
그리고 그 위에 보라색 휘장을 덮고 작은 십자가를 올려놓는다
그 앞 아래에 작은 밥상 위에는
떡 조각과 포도주 잔을 올려 모시고
흰 천으로 덮어놓았다
금곡동 영구임대주택에 나가 사는 한동호 전호성 형제님은
방안에 가족들 틈에 끼어 준비 찬송을 이끌어 본다
장전동에서 일찍 도착한 김순자 자매님은
물 아까운 줄 모르고 연방 걸레 빨고 또 닦으면서
가는귀가 먹어서인지 예배준비 찬송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윽고,
중풍 장애인 김태일 형제님이 목사와 손잡고 도착한다
그 뒤로 사모님과 목사님 모친 김영예 집사님이 따라오시지만
벌써 5주 째 이덕순 할머니는 노환이 깊어져 오시지 못한다
예닐곱 평 방안 가득 빽빽한 사이사이를 헤집고
제 자리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좌정한 목사는
고장난 찬송 반주기지만 정성스럽게 만지며
예배를 준비한다
예배시작 알림의 징 소리 낮게 울리면
일제히 엎드려 경배를 하고
1984년 세계교회의 리마 예식서와 우리 식을 가미한 순서지에따라
목사는 세례 여부를 막론하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준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썰물처럼 뒷마당으로 나가는 부활의 집 가족들
일제히 연기를 뿜어댄다
거룩한 예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누렁이 '복실이'와 흰둥이 '풍아'는 그저 좋아 껑충거린다
부엌에서는 주방장 김영태 형제님이 바쁘다
뽐낼 수 있는 특별 요리로 기대가 된다
작은 방에서는 구장서 형제님이 사모님과 헌금을 계수 한다
둔탁한 손으로 천 원짜리를 세며 돋보기 안경너머 장부에 적는다
배추 잎도 제법 있는 모양이다
지난주간 보건복지부로부터 월급이 나왔으니
아마 몇 형제분은 십일조를 했나보다
원불교 교당에서 법회에 참석하고 오신 최경원 할아버님이
식사시간 맞춰 어김없이 올라 오셨고
우리는 함께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육이오 전쟁 때 만주에서 단신으로 내려와
54년을 일구고 지켜온 집을 내주고 단칸방에 홀로 나가 계신다
기쁨으로 한 가족처럼 한 식구가 된 여든 셋의 노신사는
부활의 집 한 분 한 분에 '공경'과 '정성'에 변함이 없다
차 한잔 도 끝나고
거실에는 다시 텔레비전 소리가 흐르기 시작한다
한 분 한 분 집을 나선다
한 봉지 한 봉지 싸주면서 인사를 나눈다
주일만은 목사도 빨리 떠나야 모두 들 다리를 뻗고
자유(?)를 만끽하겠지
2004. 4. 4 고난주간 수행을 떠나며
왕꼬지 목사, 김홍술의 사는 이야기(4)
4월 18일 출발하여 28일 밤에 도착한 해외 나들이는 내게 있어서 회한의 마침표였다. 2000년 전주 한일 장신대학교 기독교사회복지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회복지사 1급과 문학 석사 취득은 당연한 결과였어야 했는데, 졸업 대상 중 나를 포함한 3명이 제외되었다. 이유인즉 입학 시 당당히 외국학위를 인정받고 정문으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총장 밀어내기 권력 암투의 희생물이 되어 졸업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억울하다고 전주 지방법원에 제소했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입학 자격의 인정 권한은 학교에 있으므로 후임 총장체제의 번복도 학교측의 권한이요 다만 우리에겐 손해 배상만 인정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부산 장신대학교의 공동학위 과정에 톡톡히 그 대가를 다시 치러야 했다. 바야흐로 필리핀 딸락 주립대학교 교육대학을 유학비자와 더불어 과정을 이수한 후, 600여명의 현지 어린 학생들 틈에 끼어 졸업식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한일 장신대학교 측의 대학원 졸업 인정의 유일한 조건이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29일 새벽 4시 30분, 여장을 풀 겨를도 없이 차를 몰고 형제들과 무료급식을 위해 홈리스 복지관을 향했다. 90여명의 식객들이 웬 박수로 반가이 맞아준다. 반찬도 차려 놓았고 국도 끓는다. 나는 식사 전 간단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 사랑의 하느님, 눈부신 새 아침을 주시고 봄 향기로 온 누리를 가득 채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준비해 주시고 이 양식이 꼭 필요한 형제님들을 불러주셨으니 우리의 기쁨이 넘칩니다. 함께 하는 이름 모를 후원자님들의 온정과 부활의 집 우리 형제들의 한결같은 손길로 이 식탁이 마련되었사오니, 이 식탁에 함께 한 우리 모두에게 축복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메-엔”
어떤 형제님이 아멘 소리를 고함치듯 지른다. 아마 한잔 걸친 듯싶다.
우리 부활의 집 형제님들의 준비 덕택에 나는 그저 국자만 잡고 국 푸는 당번을 지키면 된다. 밥 푸는 최 권사님의 능숙한 손놀림이 시작되었다. 질서 있게 식탁으로 날라진 국밥은 ‘전달-전달’ 하며 각자 앞으로 전해진다. 어디선가 욕찌거리 소리가 몇 번 오가더니 한 판 붙을 기세다. 대의원 J형제가 잽싸게 뜯어말리니 다소 진정은 되었다. 어쩌다 이런 취객으로 밥그릇이 날아가고 한번씩 곤욕을 치르기도 하는데 오늘은 싱겁게 끝났다. 요즈음은 이런 작은 실랑이도 귀엽고 살갑게 여겨지니 모두 기쁘고 재미가 난다. 예전에는 나도 휘말리면서 소매 걷어붙인 채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때면 목사고 뭐고 안중에 없다.
“야이 ㅆ 새끼야! 목사, 죠까는 소리마 이 ㅆ팔 놈아, 엉.”
나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힘으로 밀어붙이고 내쫓아 버렸다. 잠시의 판정승으로 끝나는 한판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아찔하고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2004. 4. 29 늦은 밤에
왕꼬지 목사, 김홍술의 사는 이야기(5)
" 아저씨, 늦게 오면 안됀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몇 번 말해도 와 일합니꺼! 하, 정말…"
" 죄송합니다. 앞으로 절대 안 늦겠습니다. "
B 초등학교 급식실 아주머니들에게 또 성화를 맞았다. 구포 부활의 집에서 12시 정각에 점심을 먹고 서둘러 오면 맞는 시간인데, 오늘 집에서 무슨 일인지 꾸물거리다 10여분을 넘겼다. 벌써 4년짼가- 방학을 제외하고 매일 오후 1시까지는 급식실 후문까지는 도착해야 한다. 여기서 나오는 밥과 국, 반찬 등은 우리 노숙자 무료급식에 정말이지 절대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굽신굽신 할 수밖에 없다. 이틀에 한 끼라 지만, 90명 100명의 아침식사 준비는 여기서 나온 음식 양에 따라 얼마나 더 준비해야 하는지 가늠이 된다. 그래도 나는 관청이나 공동모금회 등에 들락거리며 혀를 굽히는 것보다 훨씬 맘이 편하다. 소박한 주방 아줌마들이 아직도 내가 목사인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이대로가 좋다.
수정동 우리 복지관 앞에 도착했다. '홈리스 사회복지관'이라 이름 붙여 작년 말 개관했지만 아직 간판도 없는 초라한 지하 식당공간 50여 평이 그곳이다. 복지관 출입구 앞에서 옷가지를 펴놓고 파시는 아주머니가 우리 차가 오는 것을 잽싸게 알아차리고, 맞은 편 파출소 쪽에 앉아 멸치를 파는 아주머니에게 반대쪽으로 옮기라고 손짓을 한다. 나는 차를 엉거주춤 대고 얼른 내려 좌판에 소복이 쌓여있는 멸치와 소쿠리 등을 함께 옮기면서
" 아주머니 옮기게 해서 어떡하죠, 죄송해서… "
" 아이고, 아입니더. 지가 미안하지예."
그 아주머니는 나보다 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더 몸둘 바를 몰라한다. 사무실에서 상근 자원봉사 하시는 최 권사님도 나오셨다. 시장 통 거리인 복지관 주변은 쑥을 파는 아주머니도 있고, 빵을 파는 아주머니도 있다. 그런데 옷 파는 아주머니가 유별 우리 차가 오면 주변 정리에 앞장 서준다. 앞 편 수정파출소에서도 얼마 전 소장이 사무실에 인사차 다녀간 후론 서너 시간 주차에도 아무런 말이 없다. 이렇게 해서 걱정하던 주차 문제는 은근히 해결된 셈이 되었다.
복지관 한 구석에 마련한 너덧 평 남짓한 사무실에는 바람에 날릴 듯이 야윈 최 권사님이 매일 출근하신다. 수개월 비워둔 사무실이 안타까워 지키기라도 하면 어떻겠냐고 자원하여 지난 2월부터 주 5일을 지켜주신다. 20대의 샤프한 젊은 직원보다 60대지만 아리도록 아껴주시고 가슴깊이 함께 해 주시는 자원봉사의 의미가 나를 더욱 숙연케 한다. 지난 10여일 동안 밀린 행정사무를 머리를 맞대고 정리하고 있는 동안 구수한 국 끓는 냄새가 사무실까지 새어 들어온다. 이젠 능숙한 솜씨로 척척 해내는 부활의 집 형제분들이 자랑스럽고 귀하다.
왕꼬지 목사, 김홍술의 사는 이야기(6)
노숙자 급식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감전동 새벽시장을 들르곤 한다. 언제부터인지 이젠 시장을 볼 때 사는 것 보다 거저 얻어 가는 것이 많아졌다. 부영상회의 생글생글 웃는 아줌마는 호박, 오이 등을 잔뜩 봉지가 터지도록 담아준다.
" 좀 못난 것이라도 이해하이소. 먹는데는 지장 없심더."
" 아이, 무슨 말씀을 요."
창녕상회의 얼굴 큰 아줌마는 나의 처가 댁 먼 인척간이다. 풋고추는 대 놓고 주신다. 오늘도 늦은 아침식사를 가게 한 쪽에서 들다가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 준다. 그리고 황지상회의 표정 없는 남자 사장님은 아마 5∼6년 동안 열 가마는 넘게 마늘을 주셨지 않았을까 싶다. 한 칸 건너 호부상회의 촉새 같은 아줌마, 우리 아저씨 안볼 때 어서 가져가라고 무를 잡히는 대로 넣어 주며 눈짓으로 어서 가란다. 양파 전문 신영뿌리상회는 전 주인 언니의 동생인지 이분은 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비품 양파 한 자루를 내어주며 얼른 눈길을 돌리고 만다. 그리고 콩나물 집 상등상회, 버섯 집 양송이 상회 등을 돌면 시장 한바퀴를 돈 셈이다.
부활의 집에 돌아오면 우선 세수보다 아침식사를 먼저 해야 한다. 면도와 세수 그리고 긴 머리를 감고 손질하는 동안 시간이 꽤 지나 어느덧 열 시가 훨씬 지났다.
" 아참, 오늘이 몇 일이지!"
어제가 30일, 돌아가신 스승 고 이승원 목사님 13주년 된 날 아닌가? 세상에, 13년만에 스승님의 기일을 하루 잊다니… 13년 전 스승의 문하에서 지하교회를 함께 가꾸던 옛 친구들이 생각난다. 해마다 그랬듯 전화라도 걸어봐야겠다고 수첩을 들고 전화통 앞에 앉았다. 제일 먼저 같은 구포 지역에서 중견 목회자로 잘 성장한 K 목사님께 전화를 걸었지만 잘 받질 않는다. 토요일이고 받을 텐데, 이상하다 하면서 다른 K 목사님께 전화를 했다. 그 목사님도 구포 지역에서 역시 중견 목회자로 자리잡은 분이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다른 이야기에 말려 제대로 동행요청도 못했다. 아니 기성 목회자에게 토요일의 나들이 요청이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거리를 느꼈다고나 할까! 잠시 후 여러 번의 재 시도 끝에 아까 그 K 목사님도 다시 통화가 되었다. 그분은 매년 그렇듯 며칠전 어머니 산소 들르면서 다녀왔다고 한다. 목사의 길을 접고 제조공장 사업에 투신한 J 전도사님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지금 막 이사할 공장 알아보러 나왔다며 정말 바쁜 표정이었다. 노력과 인내의 끝에 교수로 변신한 K 집사님은 전화가 닿질 않는다. 장모님이란 분이 차갑게 모른다고만 하며 전화를 끊어버린다. 오랜 부목사를 지키던 C 목사님은 전화번호가 바뀌어 이곳 저곳 수소문 끝에 기장에서 담임 목회를 한다고… 사모님과 는 전화가 닿아 정말 구수하게 통화만 남기고 말았다. 인천에 목회자 사모로 가신 L여사, 부산에서 중학교 교사로 있는 K여사, 서울에서 목회자 사모로 보건소 간호사로 있는 J여사 등 정말 오랜만에 옛 스승을 구실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이젠 모두 40의 턱을 넘어선 중년 여성이어서 약간 어색한 느낌도 있었지만 반가움과 추억의 기쁨도 있었다.
12시, 점심시간이 되었나 보다. 부활의 집 가족들이 모두 모여들었고 상을 펴려는데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내 눈치를 보는 모양이다. 오후에는 하는 수 없이 나 혼자 스승님을 뵈러 갈 수밖에 없나보다.
2004. 5. 1
(전화 011-872-4104)
(후원계좌: 부산은행 061-01-038207-6, 사단법인
도시빈민사회복지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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