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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호(왼쪽) 감독의 동래고 선수 시절. 교문 앞에서 학교를 배경으로 팀동료 노정환, 정광천과 포즈를 취했다. 고풍스런 학교 건물이 눈길을 끈다. | |
원래 선대의 고향은 충청도였는데 할아버지대에 통영에 정착했다. 조선말 충청도에서 벼슬을 하던 할아버지는 통영서 귀양살이를 한 뒤 눌러살게 됐다. 할아버지는 조선말의 혼란스러운 세상이 보기 싫다며 통영서 아예 추도로 들어가 세상과 등졌다. 추도에서 어업을 하며 세월을 보내던 할아버지는 섬에 사람들이 불어나자 용머리 부근에 학교를 지어 교육에 힘을 쏟았다. 아버지를 일본에 유학시킨 것도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는 선생이 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비록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지 못했지만 형은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나름대로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육사 재학 때 축구부 주장으로 활약했던 형은 그러나 월남전에 참전해 전사함으로써 그 뜻을 펴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사업가가 됐지만 그 덕택에 우리 남매는 윤택한 유년을 보낼 수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한창일 때는 우리 집에 사람들이 항상 북적거렸다. 아버지는 늘 어려운 친지나 이웃들을 불러 식사대접을 하고 옷을 사주곤 했다. 학교에도 희사를 많이 하는 등 사회사업에도 관심을 쏟았다. 아버지는 당시로선 꽤 인텔리층에 들었지만 사이드카(오토바이)를 즐겨 타는 스피드광이기도 했다. 철마다 엽총을 들고 사냥을 나서는 것도 오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내가 축구를 시작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컸지 않았나 판단된다. 아버지는 말씀이 많지 않았지만 어린 나를 데리고 자주 여행을 다니면서 넓은 세상을 보여주려 애썼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유년의 추억들은 내게 개방적이며 열린 마음을 갖게 했다. 자유분방한 내 성격도 그래서 형성된 것인지 모른다. 형이 육사시절 축구부 주장을 한 것을 보면 운동신경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귀중한 유산이 아닌가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다. 라디오로 국가대표 축구경기 중계를 듣다가 한국이 자유중국(대만)에 2-3으로 져 하루 종일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함흥철 차태성 우상근 등 축구 1세대들이 활약할 당시였는데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되지 않아 제대로 체제를 갖추지 못한 시절이었다. 나는 그때 마음먹었다. 지금부터 축구를 해야겠다, 반드시 한국팀을 아시아의 강호로 우뚝 서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는 아버지께 축구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는 "이왕 하려면 열심히 하라"며 선뜻 허락해 주셨다.
이때부터 나의 험난한 축구인생이 시작됐다. 아니, 시작이라기보다 축구를 하고 싶어 몸부림쳤던 방황기라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4학년 때부터 육상선수였던 나는 축구까지 겸하게 되니 봄에는 육상, 가을에는 축구 하는 식으로 운동을 했다. 통영의 해저터널 옆에 나의 모교 두룡국민학교가 있다. 훗날 최귀인 강일근 등 국가대표를 숱하게 배출한 축구 명문으로 이름을 날린 학교다. 축구부에 들어가자 조순용 코치는 내게 레프트윙을 맡겼다. 축구를 시작한 뒤 얼마 되지 않아 통영 5개 국민학교 대항전이 열렸다. 5학년으로 결승전에 출전한 그날, 공교롭게도 결승골을 터뜨려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날의 기억은 나의 축구인생에 '행운'이라는 두 글자를 영원히 새겨 주었다. 이날의 골이 시초가 돼 늘 행운이 따랐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제일모직에 입단했을 때도 데뷔 무대에서 첫 골을 터뜨려 일약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공격수와 수비수를 겸하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지금 말로 하면 멀티플레이어인 셈이다. 당시엔 대회란 게 별로 없어 가을에 열리는 경남대회가 고작이었는데 6학년 때 준우승을 한 것이 최고의 성적이었다. 대신 통영대회에선 2연패를 했고 내가 졸업한 다음 해에도 우승해 3연패를 하면서 모교가 축구명문으로 자리를 굳혔다.
1957년에 통영중학교로 진학하면서 동기생인 박무웅과 내가 좌우 인사이드를 맡아 팀을 이끌었다. 당시엔 W포메이션이라고 해서 공격수 3명에 미드필더가 2명인 시스템이 유행이었다. 지금 보면 인사이드란 자리가 공격형 미드필더와 비슷한 역할이었다. 진주중엔 역시 통영 출신인 전강지 홍경구 등이 중심이 돼 두 학교가 쌍벽을 이뤘다. 쌍벽이라니 말은 거창한데 실상은 한심할 정도였다. 지도자가 없어 체육교사가 코치를 맡았다. 공도 귀했던 시절이라 가죽공에 바람이 빠지면 자전거방에 가서 바람을 넣어와야 했다. 1학년 땐 게임은 생각도 못했고 2학년 땐 가끔 게임에 들락거리다가 3학년 때 가서야 부산이나 진주 원정대회에 참가한 것이 시합의 전부였다. 꾸지람도 잘 안하고 늘 지켜보기만 하시던 아버지가 나를 부산에 데려가 큰 시합을 보여준 것이 그나마 좋은 경험이 됐다.
1960년은 악몽 같은 시련기였다. 미국의 목화가 무상지원으로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아버지의 목화사업이 하루아침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가세가 기울면서 축구를 하기 힘들어졌다. 통영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축구 없는 하루하루가 너무도 힘겨웠다. 갑작스레 찾아온 가난은 큰 장벽처럼 나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위기는 너무 서둘러 다가와 나를 얽어매었다. 1년간의 긴 방황기가 지속됐다. 그러다 2학년초 진주고로 전학해 선수생활을 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동래고보(동래고 전신) 출신인 아버지 친구 김영기 씨의 주선으로 동래고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운명적인 만남. 내 축구인생은 비로소 여명의 시간을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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