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제헌국회의원 문시환(1899~1973)
-사진제공:김현포(50)
부산시 연제구 연산동에서 1899년에 태어났다.
일찍이 동래의 동명학교(동래고등학교 전신)에서 수학하던 그는 교사 김병규의 교육에 크게 감화를 받고, 일제강점의 민족적 의분으로 3학년 때 무단가출하여 만주 안동현으로 갔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을 돕고 활약하다가 귀국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백산상회의 안희재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기미육영회의 외국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20년 동경정칙영어학교에 유학하여 2학년과정을 수료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대학에 입학하였다.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편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자, 경남기성회(慶南期成會) 대표로 동 회의에 참가하여 노동위원(勞動委員)으로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를 확대 개조하려는 안창호(安昌浩) 계열의 개조파(改造派) 간부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방략과 독립운동단체의 통일기관을 조직하기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의 결말이 흐지부지 끝나게 되자, 상해에서 보천교청년회(普天敎靑年會) 대표 강홍렬(姜弘烈) 등 개조파 지지자들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 후 의열단에 가입하며 단장 김원봉 등과 협의한 끝에 구여순, 강홍렬, 김정현, 오세덕, 배치문과 같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의 파괴와 총독 등 요로대관 암살의 임무를 띠고(이미 1,2차 계획은 실패) 문시환은 3차 계획으로 파견되었다.
1923년 10월 문시열, 강홍렬, 배치문 등은 일본과 신의주, 황해를 건너 국내에 잠입하였다.
김정현이 신의주를 지나는 열차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이어 구여순, 오세득이 체포 되었다.
문시환 역시 동년 12월 29일 경성 종로경찰서에 의해 체포되어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3년 구형에 징역 2년의 언도를 받고 2년간 갖은 고초를 겪고 출옥하여 광복 때까지 일경의 요시찰 대상자로서 행동에 자유를 잃은 생활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이 되고 정부수립 후 경상남도 지사를 역임하였다.
1973년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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