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번 재경동창회 사무국에서는 "동고 인물 열전"이란 제목으로 발굴되는 데로 시리즈로 게시판에 올리고자 합니다. 우선은 작고하신 선배님중에서 동고를 빛낸 선배님들을 순서 없이 게시 하고자 합니다. 동문 여러분들도 관심을 가지시고 추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번엔 부산시에서 발행되는 '부산이야기"3.4월호에 게재된 부산을 빛낸 인물에 난 것을 옮겼습니다.
조국 독립 앞장선 숨은 애국자
가족 모두 독립운동…대동병원 설립, 인술로 어려운 이웃 도와
한흥교(韓興敎)는 1885년 부산 동래 교동(校洞·지금의 명륜동)에서 담뱃대 공장을 경영하던 한규용(韓奎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래지역 신학문의 진원지인 개양학교와 삼락학교(동래고등학교 전신)에서 근대학문을 익혔으며, 1904년 삼락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로 유학을 떠난다.
오가야마[岡山] 의학전문학교에서 의술을 익힌 한흥교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의 운명이 일본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허우적거리자 고향으로 돌아가느냐, 남의 나라이지만 혁명의 불꽃 속으로 뛰어드느냐의 갈림길에서 중국 상하이로 가는 길을 택한다.
- 부산 동래 출신
한흥교는 상하이적십자사 전적(前敵:一線이라는 뜻) 구호대에서 중국 혁명군과 함께 무창(武昌)·한구(漢口)·낙양(洛陽) 등지를 떠돌면서 의료활동을 전개한다. 이후 상하이 적십자병원장의 요청으로 남경분원에서 근무하다 항주의전(杭州醫專) 교수를 거쳐 북경의전(北京醫專)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곳에서 김규식(金奎植)·유동열(柳東悅)과 인연을 맺고 그 해 여름 상하이에서는 신규식(申圭植), 조성환(曺星煥)을 통해 신채호(申采浩)·조소앙(趙素昻)·신석우(申錫雨)·박찬익(朴贊翊)·신무(申武) 등을 만나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뜻을 세운다.
독립을 갈망하던 한흥교는 1912년 동제사(同濟社 : 동주공제(同舟共濟), 즉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에 도달하자-를 표방하면서 청년교육, 박달학원 설립, 군사교육 강조)를 조직하는 한편, 이 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중국과의 결속을 돈독히 하기 위해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에 참여하여 중국인 동지들을 규합한다.
- 중국에서 활발한 독립운동 전개
중국에서 활발한 독립활동을 전개하던 한흥교는 1916년 3월, 고향의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과 함께 귀국, 부친과 가족의 권유로 동래에 대동병원(大同病院)을 개업한다. 그러나 빼앗긴 조국에서의 생활은 자유롭지 못했다.
한흥교의 주위에는 늘 일본 경찰의 감시가 뒤따랐고, 사흘이 멀다하고 경찰에 불려 다닌다. 결국 1년 6개월간의 고국 생활을 뒤로하고 한흥교는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다. 중국으로 건너간 한흥교는 중국 재정부 인쇄국 의무실에 근무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한흥교는 중국 경사(京師) 전염병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신문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전개한다.
2∼3명의 동지들과 '중외통신사(中外通信社)'와 '신광신보사(晨光新報社)'를 설립, 한글과 한문으로 중외통신과 신광신보를 간행하여 국내는 물론 러시아와 구미 각지로 발송한다. 또한 '앞잡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한생(恨生)'이라는 필명으로 일본의 침략성과 민족독립의 타당성을 호소한다.
- 가족 모두 독립운동 헌신
이즈음 한흥교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의열단의 북경주재대표로도 활약한다. 중외통신사를 경영하던 그는 국내외에서 임시정부로 들어오는 통신이나 서류 전달을 담당한다. 북경에 비밀리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는 한흥교의 두 아들이 독립선언문과 기관지를 직접 배달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활동은 5∼6년 동안 계속된다.
한번은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는 그의 맏아들에게 안희제(安熙濟)에게 전하는 편지 1통을 주면서 심부름을 시킨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흥교의 아들이 중국으로 돌아갈 때 안희제에게서 받은 편지 1통에는 거액이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이던 김갑(金甲)에게 보내는 독립운동 자금이었다.
독립운동을 위한 국내외 연락책으로 활발히 활동한 탓에 한흥교의 가족은 지겹도록 이사를 다녀야 했다.
- 병원 운영과 동래에서 독립운동
한흥교가 두 번째로 조국 땅을 밟은 것은 1927년이다. 그의 삶에서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부친이 별세했기 때문이다. 2차 귀국 후 한흥교는 주위의 권유로 다시 대동병원을 운영하면서 가계를 돌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동래 지역의 민족·사회운동에 관여한다.
당시 동래 지역의 사회운동은 청년운동가들의 계속되는 검거로 침체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지역의 여론 기관으로 출현한 것이 1930년 결성된 경오구락부(庚午俱樂部)이다.
한흥교는 1932년 만주를 거쳐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 천진(天津) 등지에서 한중연합 항일운동에 앞장선다. 그가 해방을 맞은 것은 임시정부와 한독당(韓獨黨)의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 대표로 있을 때로, 1946년 5월 한흥교는 태원지구에 있던 300명의 동포들과 함께 조국 땅을 밟는다.
- 고귀하고 올곧은 품성 소유
한흥교는 고향 동래로 돌아와 마산도립병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이승만의 독재에 회의를 품고 정치에 뜻을 두어 진보당 초대 경남위원장 등을 지내다 1967년 8월 82세로 타계했다.
부산을 빛낸 인물 한흥교는 묵묵히 독립운동을 지원한 든든한 내조자였다. 누구나 주목받고 싶어하고, 우상이 되고 싶어하는 요즘 시대에 뒤에서 묵묵히 실천하는 삶을 보여준 한흥교는 진정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배우고 닮아야 하는 인물이다.
-자료 : 부산시 발간 '부산을 빛낸 인물'
조 민 제 / 부산이야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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